모처럼 잠실반 회원 100% 출석한 날, 교수님은 이럴 땐 휴강을 해줘야 한다고 말씀하고는, 배움의 갈망이 가득한 회원님들의 눈길을 받고 급 말씀을 거두셨습니다. 특히 어제 강의는 교수님의 주전공인 근대 시에 관한 강의였기에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펼쳐질 거라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1. 산유화(김소월)
2. 고향(정지용)
3. 수라(백석)
4. 자화상(윤동주)
5. 자화상(서정주)
자~ 이 다섯 편의 시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시가 가장 좋나요? 잠실반 투표 결과 1등은 3번 백석의 시 <수라>가, 2등은 윤동주의 <자화상>이 선정됐습니다. 제 생각엔 교수님 강의를 듣기 전이었다면 백석의 시가 1등이 되진 않았을 거예요. 교수님이 이 시를 특히 좋아하신다고 해석을 길고 강렬하게 해주셨거든요.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제게 <백석 시 읽기의 즐거움>, 유성호 교수님 공저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힌 바람벽이 있어>를 가장 좋아합니다.) 책에는 공동 저자들의 대담이 실려있는데 그중에서 교수님 말씀을 일부 발췌해서 들려드립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수업을 할 때 들려주는 이야기인데요. 정지용의 시에는 명편이 주는 눈부심이 있어요. 명장이 수려하게 빚어낸 단아하고도 견고한 미학이 근대시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경험되어야 할 세계이지요. 이러한 눈부신 명편의 위의(威儀)는 그의 후기시까지 이어집니다. 가령 <백록담> 시편까지도 다 그렇지요. 그런데 정지용에게 가장 빈곤한 부분이 바로 백석의 득의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그게 좀 감각적으로 말씀드리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게 없다는 겁니다. 산뜻하고 눈부시고 대상과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면서 다가오는 정지용 음역의 눈부심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텍스트를 한동안 놓고 쓸쓸한 자기 동일시의 시간을 갖게 하는 감동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석은 후기의 거의 모든 시편이 명장이 빚은 아름다운 수공예품이라는 생각은 안 들 정도로 투박하지만,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진정성을 전해주는 놀라운 힘이 담겨 있어요. 그게 정치적 삶도 아기고 미학적 삶도 아닌, 일상적인 삶까지 다 전해오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서정주에게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급 텍스트로서 놀라운 대중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백석의 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그 감동의 여운이 꽤 오래 가지요. 교수님은 서정주 시인의 눈부신 명품 문장의 시는 죽어도 못 쓸 것 같지만, 백석의 시를 읽으면 한 번 자신도 비슷하게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자작시가 기대됩니다.ㅎ
근대 한국 대표 시인 다섯 분의 이야기를 모두 연계해서 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어주시는 교수님의 명강의는 감동이었습니다. 한편 마다 정수를 뽑아 말씀해 주시는데 이곳에 다 적으려니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바쁜 일정이 있어 여기까지만 적고 갑니다. 이해해주시길요...
다음주는 잠실반 문우님들의 작품 합평시간입니다. 이번 한주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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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修羅) ― 백석(1912∼1996)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