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합평 : 전숙자 님의 글 「나다(nada)는 나띵(nothing)이다」- 논점이탈에 주의할 것. 정현종의 '탕진만이 욕망을 쉬게 하리라'는 문장을 참고하여 사유해 볼 것. 일상 속 피정의 의미를 숙고해 볼 것. 나의 본질적 자아만으로 살 수 없다. 내면적 자아는 따로 있으나 세상을 살면서 상황에 변화하여 대처하게 된다.
2. 수업 내용: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p. 239~)
- 전도된 불구자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인간만큼 거대한 귀'로 표현한다. 그들은 바로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무언가 한 가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능력만 키우느라 여러 가지 능력을 퇴화시킨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차라투스트라는 그들(현대인)을 온전한 인격이 아니라 토막난 사람들이라고 냉소한다.
- 만사 귀찮은 게으름뱅이, '최후의 인간'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의 시간이다. 이들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도 싫어한다. 세상일에 냉소적이고 '세계에 싫증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진짜 '세계에 싫증이 난 병자'나 '기력을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간교한 게으름뱅이'거나 '훔쳐먹기를 즐기는 쾌락의 고양이'들이다. 이들이 냉소적인 이유는 엄밀히 말해서 세상 살기 싫다는 게 아니라 무언가 욕망하는 게 있는데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 이런 면에서 그들은 루저(loser)일 뿐이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의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속에서만 행복을 찾는다. 최후의 인간은 허무주의의 전형이자 완성처럼 보인다. 니체는 현대성 (혹은 유럽 민주주의)이 그런 인간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참고) 허무주의의 세 단계
1) 부정적 허무주의 (negative nihilism) : '이 세계'를 창안하고 모든 진리와 도덕의 기준을 거기에 둔다. 그러고 나서 '저 세계'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천국이나 이데아라는 것들이 생겨났다.
2) 반동적 허무주의 (reactive nihilism) : 기준이 되었던 '고차적 가치'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저 세계' 자체가 전쟁터가 된다. 신의 말을 빙자하거나 아예 신의 자리를 꿰차려는 것들이 많아진다.
3) 수동적 허무주의 (passive nihilism) : 가치 평가 자체를 무의미하게 보고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헛된다', '해봤자 쓸데없는 짓이다'라는 생각.
3. 반동정 : 양구에서 오래 머물다 돌아오신 전 선생님을 반갑게 맞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점심으로 함께 먹은 추어탕으로 여름 맞이 보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