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사건』
9월 18일 가을학기 두 번째 시간에는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기 고백적인 소설 『사건』을 읽었습니다. 얇은 책 한 권에 이토록 무겁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몰랐습니다. 작가가 이십대인 1960년대 겪었던 임신중절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 그대로 끔찍한 사건입니다. 당대에는 낙태가 불법이라 집도하는 의사나 수술 받는 여성 모두 엄하게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초현실주의 문학에서 여성의 역할>이란 주제로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주인공 ‘나’는 소상공인 부모를 두고 있습니다. 집을 떠나 프랑스 루앙에서 대학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똑똑한 여학생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있습니다. 남자친구 P.와 관계에서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한 후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낙태를 원합니다. 소설 초반 작가는 임신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grossesse와 기괴한 grotesque를 나란히 두는 언어유희를 보입니다. (민음사 21쪽) 미혼의 여대생에게 임신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었을까요. 그녀가 처한 절박한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읽는 내내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불편한 만큼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그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 순간 두려움에 몸서리쳤습니다.
임신 중절 시술사가 ‘천사를 만드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탐침관이라는 기구를 삽입함으로써 낙태 시술이 이루어지는 은밀한 공간은 파리 17구 엥파스 카르디네에 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후 거리 안내판에 엥파스가 아닌 파사주 카르디네라고 적혀있는 걸 보고선 안심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50쪽) 막다른 길이란 뜻을 지닌 엥파스(impasse)가 아니라 통행, 통과 의미를 뜻하는 파사주(passage)를 본다는 건 무사히 시술을 받고 난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50쪽 주석)
“임신 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아니면 금지되었기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우리는 법에 비추어 판단했고, 법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32쪽)
“신성한 무엇처럼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 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75쪽)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78쪽)
위 세 대목에서 나쁨, 금지, 신성, 금기란 단어가 눈에 띕니다.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이란 책에 <토템과 터부>라는 세목이 있는데요, 터부(taboo)의 의미가 위에서 열거한 단어들 뜻과 같습니다. 터부에는 신성하고 성스러운 의미가 있는 반면 두렵고 위험해서 금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금기시하는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요. 금기와 위반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건』에서도 불법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르고 고통을 받습니다.
작가는 『사건』을 통해 계층 간 뚜렷한 차별과 여성이 상대적으로 억압받는 당대 프랑스 사회를 가감 없이 비판합니다. 아니 에르노와 같은 프랑스 출신 철학자 미셀 푸코(1926~1984)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 하려는 힘과 권력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지식과 권력이 결탁한 채 거대 담론을 형성하며 정상과 비정상으로 경계 짓습니다. 성 소수자, 빈민층, 광인에게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심으며 차별 합니다. 푸코는 권력의 실체를 추적해 나가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애씁니다. 아니 에르노 역시 자신이 겪은 주관적 체험을 극대화한 극사실주의(hyperrealism)에 입각한 글쓰기를 통하여 은폐되고 부정한 사회의 민낯을 끊임없이 드러냅니다. 이십대 여성이 감내하기엔 너무 가혹했던 절망, 고독, 슬픔을 다시 헤아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