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11장 & 12장
9월 25일 가을학기 세 번째 시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11장 <무덤의 노래>와 12장 <자기 극복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무덤의 노래>와 <자기 극복에 대하여>는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 (Wille zur Macht/Will to power)가 담겨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니체는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강렬하고도 음울한 천재’, 쇼펜하우어에게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의지는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의지는 욕망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 같습니다.
고대 소크라테스부터 근대 헤겔(1770~1831)에 이르기까지 학문세계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가 중심이지만 쇼펜하우어 이후 이성에 반하여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5)에서도 욕망이 살짝 보입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소마 세마(soma sēma)’란 표현이 있는데요,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란 뜻입니다. 영혼불멸 사상을 굳게 믿던 고대인들에게 육체는 영혼을 속박하는 감옥이나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감각이 지배하는 육체보다 정신이 우월하다는 이원론적 사고가 오랫동안 서양 지성사를 지배해왔습니다.
모든 가치를 전도하고 새롭게 사유하는 니체(1844~1900)에 이르면 영혼이 오히려 육체를 가둔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신체에 깃든 강한 생명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분출하고자 들끓는 생명의 힘에 비하면 이성은 허약할 수밖에요. 서서히 철학의 주된 관심이 이성에서 욕망으로 흘러갑니다.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 상태로 있습니다. 심지어 우린 타자의 욕망조차 욕망한다고 말하지요.
쇼펜하우어는 욕망에 휘둘리는 고통스런 삶에 염세적인 생각을 갖는 반면 니체는 끝없이 샘솟는 욕망을 힘 의지와 연결하여 우리 삶(생명)을 추동하는 근원으로 여깁니다. 매순간 자기 극복(self overcoming)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삶을 바라볼 때 그 근저에는 힘 의지가 있습니다. 니체에게 힘 의지는 자기보존을 지향하는 삶의 의지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늘 그 이상을 원하는 역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상승과 강화를 통하여 힘 의지는 고양된 삶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니체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말고 불편함 마저 감수하며 위험하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 눈에 띄는 대목 옮겨 봅니다.
“모험과 위험, 목숨을 건 주사위놀이가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이 더없이 큰 자가 하는 헌신이다.”
“보라, 나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렷다./ 생식을 향한 의지 또는 목적, 보다 높은 것, 보다 먼 것, 보다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요, 동일한 비밀이다.” (책세상 195쪽)
<무덤의 노래>에서 니체는 젊은 날 자신이 고귀하게 생각했던 신성, 극복의 승리, 황홀경의 춤 등이 적으로 생각했던 번민, 연민, 경건, 유령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무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무덤은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는 최초의 표시입니다. 동물들에겐 무덤은 없지요.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1904~1987)은 『신화의 힘』에서 무덤(tomb)과 자궁(womb)을 연결해 이야기합니다. 무덤은 재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니체는 젊은 날의 환영(phantom, vision)이 묻혀 버린 무덤에서 불굴의 의지에 의해 그 환영이 부활하는 노래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