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12월 4일 용산반    
글쓴이 : 차미영    23-12-08 14:38    조회 : 1,332

비인정(非人情)으로 떠나는 여행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겨울학기 첫날 만난 작가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입니다. 두 주에 걸쳐 그의 초기 소설 풀베개(1906)를 읽습니다. 124일 첫 시간에 작가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드러난 세계관과 다른 작품들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백여 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도 유려하고 풍부한 표현에 거듭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서양 문화와 문명을 접한 경험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론이 소설 곳곳에 펼쳐집니다. 풀베개를 읽다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떠올랐습니다. 조이스와 소세키가 그리는 예술론이 겹치듯 합니다. 순수 객관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대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 마음 깊이 우러나는 깨달음의 빛이 진정한 예술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 시작 부분, 그림과 시에 조예가 깊은 주인공 는 어느 봄날 산행 길에 오릅니다. 속세를 떠난 듯 숲속 자연 풍광에 몰입하며 배회하는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립니다.

비가 움직이는지, 나무가 움직이는지, 꿈이 움직이는지,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다(현암사 26)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앞으로 전개된 소설의 분위기가 짐작되는 듯 했습니다. ‘는 사람들과 문명의 이기로 북적이는 인정의 세계를 떠나 어딘가 홀린 듯 취기가 느껴지는 비인정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도시 산책자, 플라뇌르가 생각납니다. 소세키가 그리듯 현세를 떠나는 건 아니지만 파리 도심을 배회하며 거니는 산책자를 뜻합니다. 예민하고 고독에 휩싸인 듯 우울한 기질을 지닌 벤야민은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온갖 이미지로부터 그의 작품 세계에 드러난 사유의 모티브를 끌어냅니다.

풀베개는 비를 피해 잠시 쉬어간 찻집에서부터 비인정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나코이 온천장 시호다 댁에 머무르며 여인 나미에게 마음이 빼앗긴 채 숨 막힐 듯 전개되는 치밀한 묘사(105)가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해줍니다. 작가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든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듯 소세키의 높은 예술적 안목이 느껴집니다.

예술품처럼 느껴진 과자 양갱이 (66), 깊은 산속 동백을 볼 때 농염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 (136~137),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눈에 떨어지는 목련꽃 (150), 내세에 환생하면 되고 싶은 명자나무 (166)에 관한 대목들은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황홀한 문장들입니다.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를 그린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오필리아와 시호다 댁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여인과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는 나미, 이렇게 셋은 닮은 듯 보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듯 여겨지는 그들 셋이 묘하게 얽혀 작품을 더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나갑니다.

가을이 되면 그대도 억새꽃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습니다.”(38 45 70) 이렇게 노래하며 깊은 강물에 몸을 던진 여인처럼 나미도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까 에게 무심코 내뱉습니다. (131)

나미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림에 담고 싶은 는 그녀에게 찾아볼 수 없는 하나를 떠올립니다. (138) 그건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 연민입니다. 연민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언급했듯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인간 본성입니다. 나미에게 연민의 감정을 엿볼 수 없었던 는 소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마침내 그녀에게서 연민을 발견합니다. (185)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중국 만주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은 사촌 동생 규이치를 배웅하는 대목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이별로 끝날 듯 엄습해오는 막연한 두려움 안에 연민의 감정이 내비칩니다. 바로 이 장면이 그림이 되고 예술이 되는 걸 는 깨달으며 작품은 끝납니다. 비인정의 세계로 여행은 떠났지만 인간의 정서와 삶이 깃들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 듯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를 읽으며 발터 벤야민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착착 감기는 매혹적인 문장들이 오버랩 되어 더 오래 여운이 남습니다.

 

 

 

 

 


신재우   23-12-09 09:26
    
1.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김응교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일본적 마음』의 <와비사비 미학>을 읽습니다.
2.차미영 선생님의 예를 든 발터 벤야민과 세익스피어 『햄릿』도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송경호 선생님의 <저녁바람이 불어와> 합평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