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끝은 어딜까
8월 5일 루쉰의 『방황』에 수록된 두 번째 소설 ⸀술집에서」를 읽고 배웠습니다. 술집이란 공간이 방황과 썩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1924년 발표되었는데 혁명과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지식인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단편입니다. 잿빛 하늘 아래 흩날리는 눈발을 배경으로 암울했던 그 시절 겨울이 상처 입은 듯 드러납니다.
주인공 ‘나’는 여행길에 고향을 방문한 다음 학교 선생으로 있었던 S시로 향합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S시에서 ‘이스쥐’라는 술집이 생각나 찾아갑니다. 술집 2층에서 바깥 겨울 정경을 응시하는 ‘나‘의 시선엔 말할 수 없는 애잔한 슬픔이 배어있습니다. 황폐한 겨울정원을 바라보며 눈에 띈 매화와 동백에 오래 마음이 머물기도 합니다.
“몇 그루의 늙은 매화나무가 눈과 싸우며 나무 가득 꽃을 피우는 것이 엄동설한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무너진 정자 옆에 서 있는 한 그루 동백나무는 짙은 녹색의 무성한 잎에서 십여 개의 붉은 꽃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 속에서 불꽃처럼 밝게 빛나는 꽃송이들은 분노하는 듯 오만한 듯 멀리 떠돌아다니는 여행자의 마음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린비 234~235면)
혁명시대를 가로지르며 품었던 결기와 의분은 허공을 맴돌다 퇴색되어버리고 눈앞에 펼쳐진 텅 빈 현실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술잔 속으로 고독이 밀려옵니다. 종업원이 아닌 누군가가 2층으로 올라오는데 그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십 여 년 전 헤어진 옛 친구이자 동료 선생이던 ’뤼웨이푸‘와 마주칩니다. 둘은 반가운 듯 어색하게 재회하며 서로의 근황을 묻습니다. ’나‘가 기억하는 친구의 용맹스럽고 강렬했던 눈빛은 이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한 거나 매한가지야.”(237면)
“여기 돌아와 보니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237면)
“지금 내 꼴은 이렇다네.” (240면)
자조 섞인 투로 말하는 친구의 지난 삶이 어땠을까 헤아려집니다. ’나‘는 친구의 내면이 드러난 고백을 덤덤하게 듣습니다. 친구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S시를 찾았지요. 친구가 들려준 사연엔 죽음이 깔려 있습니다. 친구가 기억 못하는 어렸을 적 동생의 죽음과 이웃집 불행한 여인 ’아순‘의 죽음입니다.
친구는 ’나‘에게 전한 이야기를 ’하찮은‘ 일로 여기려합니다. 죽음이란 무거운 모티프를 다루면서 겉으론 시시한 일로 가볍게 지나가는 것처럼 비칩니다. 어쩌면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비루한 삶이 너무 무거워 그 사연들은 그에게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타자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지만 버텨나가야 할 현실이 친구에겐 녹록치 않으니까요. 한편 어머니에겐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선의의 거짓말로 어머니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합니다.
루쉰이 ⸀술집에서」를 발표한 1924년 같은 해에 우리나라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나옵니다. 제목과 달리 그 날은 인력거꾼인 김첨지의 아내가 비참하게 죽는 날이지요. 루쉰은 ⸀술집에서」 눈 내리는 겨울날, 방황하는 지식인을 그립니다. 반면 『운수 좋은 날』은 비 내리는 겨울날,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보여줍니다. 술집에서 만난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장면도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술집에서」 마지막 대목은 그저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나‘와 친구는 헤어질 때 둘이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차가운 바람과 내리던 눈발도 이젠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앞날을 헤쳐 나갈 의지를 드러낸 반면 친구는 다시 옛것을 가르치며 여전히 지친 모습으로 방황을 이어갈 듯 보입니다.
방황의 끝이 있을까요.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린 일생동안 헤매며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문득 괴테의 『파우스트』 ’천상의 서곡‘에 나오는 주님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
(Es irrt der Mensch so lang er strebt. 317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