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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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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리브랜디    
글쓴이 : 노정애    24-09-06 10:41    조회 : 4,636

                                              체리브랜디

                                                                                                                노정애

 

  그해 3, 둘 다 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대학원 진학과 조교생활을 병행했다. 시작은 자신만만했는데 후회의 연속이었다. 매일 쏟아지는 과제와 발표는 얄팍한 내 지식의 밑천을 금방 드러냈고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잡혔다. 조교일도 제대로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할 수 있다. 힘내자를 수없이 대뇌었지만 자존감은 바닥보다 더 떨어져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늘 허둥거리고 쩔쩔매는 실수투성이로 3월을 보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뿌듯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한 달만 더 버텨보자다짐하며 국제시장 수입품 상가를 뒤져서 체리브랜디를 샀다. 칵테일에 주로 쓰는 리큐르 제품이라 고가는 아니었다. ‘고생했어 정애야, 이 정도면 잘했어나를 위로하는 선물이었다.

 대학 4학년 즈음 학생들 사이에서 칵테일이 유행했는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때 가끔 즐겼다. 학교 근처에 맥주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동기들의 단골 술집이 있었다. 맥주 한 잔으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내게 바텐더가 딱 맞춤이라며 추천해준 것이 체리브랜디였다. 커다란 볼에 오목한 립, 긴 스템을 가진 부르고뉴 와인글라스에 낮게 깔린 루비 빛의 액체. 스템에 손가락을 깊숙이 끼워 볼 전체를 감싸 내 체온으로 데워서 조금씩 마셔보라고 했다. 안주 대신 얼음물 한 잔을 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가격은 다른 칵테일에 비해 조금 비쌌지만 적은 양도 마음에 들었다. 내 체온을 나누며 살짝살짝 잔을 흔들어주니 볼 표면에 술이 지나간 길이 보였다. 오목한 볼에는 체리향이 넘쳤다. 한 모금, 진한 향이 훅 들어오더니 달콤하면서도 강한 독주의 쓴맛이 따라왔다.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입 안 가득 체리향이 남았다. 천천히 조금씩 마셨다. 틈틈이 얼음물로 열기를 내리니 취하지도 않았다. 향은 오래 머물렀고 기분도 좋았다. 딱 내 맞춤 술이었다. 동기들은 달고 양도 적은데 비싸기까지 하다며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막걸리와 소주를 찾았고 나 또한 가격이 부담스러워 자주 마시지는 못했다. 돈을 벌면 병으로 사야지 하면서 바텐더가 잔에 술을 따를 때 유심히 봐두었다.

 집에 몰래 모셔온 술은 유리 미닫이가 있는 깊은 책장에 숨겼다. 앞에 두껍고 큰 원서들을 세워놓고 위로도 책들을 눕혀 쌓아서 뒤쪽에 은밀하게 보관했다. 커다란 와인 잔 대신 소주잔을 곁에 두었다. 집에는 식전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드시는 애주가 아버지 덕분에 소주잔만 많았다. 내 방 청소는 스스로 했고 웬만해서는 부모님도 잘 들어오지 않으니 완벽한 저장고였다.

 약속이 없는 늦은 저녁 퇴근할 때면 오늘은 한 잔 해야지라는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식구들이 잠든 자정에 가까운 시간, 차가운 물 한 잔을 곁에 두고 방문을 잠갔다. 비밀 저장고에서 술을 꺼낼 때의 떨림이란. 역시 몰래 마시는 술 최고! 소주잔에 체리브랜디를 채웠다. 잔을 두 손에 감싸 안고 밤의 창가에 섰다. ‘수고했어. 오늘 하루도나직하게 말하며 한 모금 마셨다. 그날의 피곤함을 풀어주는 달달하고 깊은 향, 짜릿한 목 넘김은 살짝 마음을 들뜨게 해서 내가 썩 괜찮은 사람 같았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실수나 잘못에 대한 반성도 하고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인간들에게 욕도 퍼부었다. 한 잔에서 두 잔 정도가 정량이었다. 적당히 오른 취기로 잠자리에 누우면 머리를 무겁게 했던 고민들은 내일로 미뤄졌다. 땅굴 속 자존감도 뛰어올라 잘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25도의 알코올 농도지만 천천히 조금만 마시기에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 혼자서 즐기는 나만의 시간은 행복했다.

 학기가 지날수록 공부할 것은 많아져서 끙끙거렸지만 수고했어요. 잘했네요.’를 자주 듣는 익숙한 날들이 이어졌다. 힘들어도 한 잔, 좋아도 한 잔, 우울해도 한 잔, 행복해도 한 잔, 일주일에 한두 번 틈새의 시간에 즐기는 잔술은 계속되었다. 빈병은 커다란 가방에 숨겨서 나와 쓰레기 소각장에 슬쩍 버렸다. 완전범죄가 따로 없었다. 몇 달에 한 번은 국제시장으로 달려갔다. 체리브랜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일은 능숙해졌고 논문이 통과되어 학위도 받았다. 책장에 숨어서 나를 기다려준 붉은 친구 덕을 많이 봤다.  

 결혼을 앞두고 내 마음은 널을 뛰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도 컸지만 선택과 결정에 따라오는 결과도 내 책임이라는 부담감은 잔술을 불렀다.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도, 낮선 서울에서 시작하는 타인과의 삶도,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걱정에 걱정을 더했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술은 빠르게 줄었다. 서울로 보낼 짐을 꾸릴 때 바닥을 보였다. 다시 살까를 망설이다 필요하면 남대문시장에 가야지 했다.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은 사치였다. 작은 신혼집에는 늘 손님이 넘쳐났고 가까이 사는 시어머니가 수시로 집에 왔다. 잠들기 전에 맥주 한 잔 할래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면 남편은 혼자 드시고 주무셔도 됩니다.”하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이 남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술을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방에서 자야하니 술 냄새를 풍길 수도 없었다. ‘~ 나 혼자만의 시간이여.’ 한동안 그리웠지만 남대문시장에 가지는 않았다. 엄마가 되면서 세월 앞에 잊혔고 그렇게 체리브랜디와 영영 이별했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이 남자도 같이 마셔줄 수 있다. 근사한 부르고뉴 와인글라스도 있다. 당장 체리브랜디를 살 수도 있다. 나만의 시간을 추억하며 한 잔 해볼까? 그 맛이 날까?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한국산문> 202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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