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가 쓴 『밝은 밤』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다. 백 년 전 과거와 오늘의 현재를 오가며 가족 구성원들 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 화해를 다루었다.
천문학자인 지연은 외도한 남편과 이혼하고 친정엄마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문대가 있는 '희령'으로 직장을 옮긴다. 이곳은 외할머니(영옥)가 사는 곳으로 어린 시절 언니(정연)와 자주 왔던 곳이다. 그러나 엄마(미선)가 언니를 사고로 잃고 난 후 외할머니와 척지고 사는 바람에 지연은 20여 년이 넘도록 외할머니를 만나보지 못했다.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지연이 우연히 영옥을 보고 외할머니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만난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지연은 영옥으로부터 3대에 걸친, 어두운 밤과 같았던 선대의 이야기를 듣고 연민을 느낀다.
백정의 딸이라고 온갖 천대를 당하다가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처음 만난 남자에게 시집간 삼천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영옥을 낳아 키운다. 삼천은 외동딸 영옥을 남편이 정한 남자에게 시집을 보낸다. 그러나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영옥은 남자를 떠나보내고 악착같이 딸 미선을 키운다. 편모 밑에서 자란 미선은 교수 남편의 폭언에도 불구하고 복종하며 산다. 그러다 미선은 큰딸 정연이 사고로 죽자 친정엄마를 멀리하고 둘째 딸 지연과도 거리를 둔다.
영옥이 미선을 키울 때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 하는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지만 그런 자식과도 소원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미선에게 영옥은 딸 눈치만 보다 지쳐 나갔다.
큰딸 정연이 죽었을 때 영옥이 미선에게 ‘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고 말한 것이 미선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그리고 엄마 미선은 딸 지연만큼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키웠는데 딸이 남편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이혼해 버린 것에 절망한다.
나는 그 미선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고 사는 것이 어디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일인가? 또 이혼만 하지 않으면 평범한 삶인가? 정연이 죽은 뒤로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지연이 불쌍했다.
괴로워하는 지연의 꿈속에 정연이 나타나 '네 곁엔 내가 있어'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지연이 안쓰러웠다. 인간의 고통은 그 어떤 경우에서든 비교될 수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책을 읽는 동안 부지불식간 지연을 내 살붙이인 양 부둥켜안고 있었다.
미선은 자식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현실을 외면하며 영옥처럼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한편 지연은 언니의 죽음을 자주 떠올려 거기서 위로받고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엄마에게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나는 끝내 듣지 못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들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에 밟혀왔다. 어릴 적 나도 지연처럼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엄마와 서먹한 지연에게서 동일시를 느꼈다.
어린 나이에 일제강점기를 겪으셨던 어머니는 6.25 전쟁통에서 지켜낸 두 아들 중 맏이를 월남전에서 잃자 삶의 의욕을 잃었다. 칠남매의 늦둥이였던 나는 십 년 동안 어머니 부재와 결핍 속에서 살았다. 늘 병을 달고 사셨던 어머니에게 연민을 아니 느낀 것은 아니나 왠지 어머니가 타인처럼 왠지 낯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내 기억에 오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세 살인 나로는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하기에도 너무 벅찼다. 열세 살 때 와서야 어머니와 만나 한 집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들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딸들에게는 소홀했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 다짐했으나 엄마 나이에 이르게 되니 당신의 아픔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러나 내 몸 저 안쪽에는 어머니에 대해 서운함이 그 무슨 잔재처럼 남아 있었는데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인 영옥과 미선과 지연이 각축하면서도 공감하는 장면을 만나면서 그런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곰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살아있는 자식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자식의 죽음을 핑계로 현실을 멀리하고 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어머니는 자식들과 재회하기 위해 의사들이 감탄할 정도로 치료를 열심히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맏이를 잃은 트라우마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지고보면 어머니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어릴 적 나의 결핍과 부재가 나만의 특수한 체험인 것 같아 서러웠는데 소설을 통해서 누구나 다 엇비슷한 불행을 지니고 산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밝은 밤 』속의 그녀들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만의 불행만이 아니었는데 나의 어린 시절을 특화해 나만 불행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살아왔다. 사십여 년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불행 못지않게 행복했던 적도 많았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