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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H 로렌스와 첫사랑    
글쓴이 : 박옥희    14-07-09 11:31    조회 : 12,051

D.H 로렌스와 첫사랑


 고백할까 말까 망설이던 사연이 있지요.

 2013년 여름 영국 문학기행 때 우리 일행은 많은 작가들의 생가를 방문했는데 D.H 로렌스(1885~1930)의 생가도 찾아 갔지요. 사춘기 시절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몰래 읽은 적이 있어요. 낯 뜨거운 장면에 겁이 나서 중간쯤에서 책장을 덮었어요. 그리고는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고해성사를 봤답니다. 이후 로렌스는 나에게 죄를 짓게 한 외설 작가로 각인되었어요. 여행 전 명작반에서 로렌스의 생애와 그의 성장 과정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잠깐은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니구나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로렌스의 생가 앞에 선 순간 그 시절 그 시 제목이 언뜻 떠오르면서 파도가 일 듯 모든 사연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거예요.

대학 1학년 햇병아리 시절 난생 처음 연애편지라는 걸 받아봤지요. 사감 수녀님에게 들킬세라 마음 졸이며 열어 본 편지에는 로렌스의 시가 영어로 단정하게 타이핑되어 있었어요. 내 수준으로 그 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로렌스라는 사람이 나에게 준 이미지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로렌스의 집 앞에서 갑자기 시의 내용이 궁금해졌어요. 서툰 영어로 안내원에게 물으니 두꺼운 책을 꺼내주면서 친절하게 <뱀>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페이지를 찾아 보여주더군요. 책이 너무 두꺼워 짐이 될까봐 주저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교보서점에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집에 돌아와 또 잊었지요.

지난 주 수필문우회에서 <청춘열차>라는 글을 합평했어요. 지금은 사라진 경춘선 열차와 성심여대가 등장하는 글이었어요. 청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편지사건이 다시 떠올랐어요. 나는 그 시절 ,지금은 가톨릭대학이 된 성심여대 3회 입학생이었지요. 아일랜드계 예수 성심회 수녀님들이 운영하던 학교였어요.

 피천득(1910~2007) 선생은 수필집인연에서 <인연>이라는 제목으로 성심여대를 이렇게 소개했더군요.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생략)

선생님이 17세 때 동경유학 시절 하숙집 주인 딸과의 애틋한 풋사랑을 회상하며 쓴 글이었어요. 아사꼬는 동경에 있는 성심여학교에 다녔고 선생은 아사꼬를 따라 그곳을 자주 산책했대요.

수녀원 뒤뜰에 보라색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 짙은 향기를 내뿜는 화창한 봄날이었어요.

알베르 카뮈에 빠져 매 주말을 텅 빈 기숙사에서 외롭게 지내는 룸메이트와 함께였지요. 편지를 들고 우리는 학교 뒷산 아지트로 올라갔어요.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거든요. 둘이서 문제의 시를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제목에서부터 왠지 징그러움이 느껴지는 뜻 모를 내용을 우리는 심사숙고 끝에 음란 시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모 대학 법대에 재학 중인 선배로 단정한 외모에 성실함이 느껴지는 샌님이었어요. 우리는 어쩌다 만나게 되었고 쉽게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요. 주말이 되어 집에 가는 날이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청량리역에 마중 나왔어요. 주말을 기다리며 우리는 즐거웠지요. 그러다 편지를 받은 다음 주말 청량리역에서 만난 그에게 나는 뱀보다 더 싸늘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요. 로렌스가 끼어들어 우리들의 사랑을 여지없이 깨뜨린 겁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그에게 작별을 선언했고 얼마 후 입대한다는 마지막 소식을 나에게 전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떠나갔어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지요. 우리 둘은 인연이 아니었나 봐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로렌스의아들과 연인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노팅엄셔의 광산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왜곡된 애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버려야만 했대요. 로렌스의 어머니는 전직 교사로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지녔고 아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켰대요.

<뱀>이라는 시도 찾아냈지요.

 이 시는 로렌스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경험을 소재로 삼았어요. 물을 길러 갔다가 황금색 뱀을 만났는데, 뱀의 아름다움에 끌리면서도 그것을 죽여야 한다는 세속의 가르침과 갈등을 일으킨대요.

시를 너무 길게 썼어요. 몇 행만 소개할게요.


Snake

A snake came to my water through

뱀 한 마리가 나의 수조로 다가왔다.

on a hot, hot day, and I(came생략) in pajamas for the heat,

어느 뜨겁고 뜨거운 날 덥고도 더운 날 잠옷 차림을 하고

To drink there.

그곳에 물을 마시러 갔다.

In the deep, strange-sceanted shade of the great dark carob tree

크고 울창한 콩나무의 짙은 야릇한 향기가 나는 그림자 속에서

I came down the steps with my pitcher(생략)

나는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 작품은 산업, 문명, 인습적인 교육 등으로 말살되는 인간의 본능과 생명력을 되살리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거래요. 즉 뱀은 우리가 느끼는 소름끼치는 악의 상징이 아니라 무의식, 충동, 원시적 본능의 힘으로써 찬미되어 있다는 겁니다.

 보라색 라일락이 피는 이 봄에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나도 피천득 선생처럼 성심여자대학에 가고 싶어요. 중간쯤에서 책장을 덮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끝까지 읽을까 봐요.

그리고는 로렌스 때문에 누명을 쓰고 떠나간 내 첫사랑도 만나고 싶어요.

이 모든 일이 간음죄에 해당될까요?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고해소로 가겠어요.

                                                                                                                    2014.<<한국산문>>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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