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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의 카프카    
글쓴이 : 김창식    14-08-16 20:14    조회 : 23,774

                                                     해변의 카프카
 
 

 바다는 고요하다. 해조음이 꿈결에 듣는 자장가처럼 귀를 간질이고 소라껍질이 뒹구는 모래밭 너머로는 해송(海松)숲이 펼쳐져 있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흰 돛배가 떠가고, 맞닿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으며, 큰 배는 갈매기를 몰고 더 먼 바다로 나아간다.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는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각인된 대표적인 바다의 이미지다. 그러나 바다가 매번 그런 것은 아닐 터.

 폭풍우 치는 날의 바다. 세상이 처음 열릴 때 그러했을까? 무(無)와 혼돈, 어둠이 뒤섞였다. 하늘이 내려앉고 파도는 치솟아 시야를 가리며 천지사방은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해는 빛을 잃고 떨어진 지 오래고 달과 별은 어둠속으로 숨었다. 뒤엉킨 비바람이 더 큰 회오리를 이루어 바위를 때린다. 광란의 바다 앞에 시인의 넋처럼 서면 무엇이 산 것이오 무엇이 죽은 것이랴? 바다야, 바다야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그러나 울부짖는 바다의 형상 또한 바다의 피부요 겉모습일 뿐.

 바다의 은밀한 속살과 장기, 피돌기를 보려면 볕도 들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해파리 떼가 공정대처럼 낙하하고 날씬한 뱀장어가 악기의 현(絃)처럼 물길을 흩뜨리는 곳. 자줏빛 물풀이 미친 여자의 서러운 울음처럼 나풀대고 덩치 큰 곰치는 미욱한 새색시처럼 바위 틈 사이로 얼굴을 감춘다. 강철 근육과 지옥의 눈을 가진 대왕문어가 마술보자기처럼 몸집을 오므렸다 펼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노랑 띠를 두른 잔 물고기 떼가 일사불란하게 제식훈련을 펼치는 곳. 그곳에 물길의 본류, 침묵하는 바다의 모습이 있으려니.

 바다가 이처럼 여러 모습으로 다가올진대, 인식하는 대상으로서의 뭇 사물이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보냐. 무심코 보고 느끼는 사물의 형상 역시 실체가 아니라 한 부분이나 양태일 수도 있다. 실존주의 소설가이자 환상적 리얼리즘의 귀재 카프카라면 바닷가에 늘어선 해송들을 보며 짧은 산문「나무들(Die Baeume)」에서처럼 이렇게 읊었으리라.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눈 속에 선 나뭇등걸과 같으니까. 겉보기에 그냥 살짝 늘어서 있어 조금만 밀면 밀쳐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멈춘다면 지나치게 상투적이며 전혀 카프카답지 않다. 카프카는 귀납적인 합리주의자가 아니니까. 그는 당연히 진술을 뒤집는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무들은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돼 있으니까."

 그래도 카프카적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하다. 삶의 모호함과 무근저성, 불가해한 세상의 부조리를 되풀이해 증언한 카프카가 아니던가. 그는 다시 한 번 연상을 파괴한다.

 "그러나 보아라.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돼 있다는 것도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

 사물은 그대로 인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물이 그렇게 보인다고 그대로인 것도 아니다.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면적인 시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전과 후, 겉과 속, 좌?우 배면의 맥락을 함께 관찰해야 추론이 가능하다. 때로 사물들의 유사?상관관계를 따지거나, 순서대로 배열하여 패턴을 찾아내거나, 사물이 작동하는 개념과 원리를 찾아내거나, 대상 속으로 파고들거나, 거리를 두고 객관화 하거나,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 너머의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어느 것이 참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궁금하면 누구나 시계를 찾지만 시간의 실체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깥 대상에 대한 인식만을 문제 삼았을 뿐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치명적인 시야의 결손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모습을 볼 때 나의 손, 팔, 가슴, 다리, 발 같은 몸의 부분만을 본다. 그러니까 나의 등과 얼굴은 볼 수 없다. 나는 '나의 전체', '전체로서의 나'를 보지 못한다. 기껏해야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 내 모습이 그러려니 추측할 뿐이다. 거울을 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일상의 나임을 인지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거울 속 모습은 잡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도 좌우가 뒤바뀌어진 허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정작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속삭이거나, 다정하게 미소 짓거나,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고요한 바다). 얼굴을 붉히며 부르짖거나, 격한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폭풍우 치는 바다). 때로 우두커니가 되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으로 침잠한다(내면의 바다). 도대체 어느 것이 나의 참 얼굴일까? 나는 아주 가끔은 허허롭고, '나로부터 멀리 떠나와 내가 아닌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데(바다 아닌 바다), 그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엇보다 곤혹스러운 것은, 나는 내가 주인인 나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 속으로 또다시 들어가 볼 수밖에. 그곳에서 산호초의 찬란한 산란, 돌무지 배경 속으로 감쪽같이 녹아드는 곰치, 형광 띠를 두른 잔챙이 물고기떼의 행진, 메두사의 머리칼 같은 물풀의 흐느낌, 해저의 정밀과 끌탕처럼 피어오르는 모래먼지[沙塵]를 보았다. 과연 바다 밑의 바다는 보아 오던 바다의 겉 보습이 아닌 전혀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곳 바다 모습 또한 '땅바닥에 단단하게 결합돼 있는 나무들'처럼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인지 모른다. 심해 밑바닥 열공(熱孔)으로부터 수증기가 끓어오른다. 어둠 속 어초 군에 기대 있는 선체너머로 해저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입의 동굴 입구는 미지의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인 것일까? 그 너머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그것 또한 전부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바다가 그럴진대 천 길 물속보다 깊다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하는가.

* <에세이스트> 50호(7-8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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