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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박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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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글쓴이 : 박유향    15-11-17 13:15    조회 : 4,186

 

박유향

 

칼을 샀다. 부엌에서 흔히 쓰는 조리용 칼이다.

10년 넘게 써오던 칼의 끝부분이 몇 달 전 약간 휘어져 새로 하나 사야겠다고 내내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칼을 사야할지 모르겠어서 못 사고 있었다. 오랫동안 쓸 물건이니까 좋은 것으로 신중하게 사야한다는 생각과 새로운 물건을 고르고 선택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낡은 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부고는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호상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당황하지 않고 장례를 치루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빨리 칼부터 사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새 칼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결국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칼을 산 일 이었다. 새로 산 칼의 서슬 퍼런 칼날을 손끝으로 눌러보니 비로소 시어머님을 온전히 보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어머님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칼 무딘 건 못 참는다‘ 는 분이셨다. 장장 반세기가 넘는 버릇이라던가, 어머님은 음식을 하시기 전 숫돌에 칼부터 갈았다. 그래서 그분이 쓰시던 칼은 항상 소름 돋을 만큼 날이 날카롭게 서있었다. 오래된 칼의 역사를 말하듯 끝부분엔 이도 약간 나가고 칼자루도 형편없이 낡아 있었지만 칼날만큼은 세상의 그 어떤 질기고 단단한 것도 단숨에 베어낼 것처럼 예리했다. 칼을 잘 갈지도 않고 무디게 쓰던 나는 시댁에 가서 시어머님 칼로 칼질을 하면 스으윽- 스으윽- 그 서늘하게 베어지는 느낌이 섬찟해서 부엌에 혼자 서서 남몰래 몸서리 치곤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어머님은 칼로 칼질을 하듯 단숨에 삶을 베어내셨다. 원래 노환이 심해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버티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켜 응급실에 가시고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평상시 죽는 거 무섭다고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려 가족들 마음을 무겁게 하셨는데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자 놀라울 만큼 의연하셨다. 누군가가 "엄마, 이제 가셔야 한대요"라고 말하자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을 찾은 얼굴과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이제 그분이 먼 길을 갈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순간 숨을 멈추셨다. 연약한 생명에 예리한 칼이 아주 낮고 빠르게 스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평생을 애지중지하던 자식들이 칼날이 스친 그녀의 삶의 단면에 남아 침착하게 지켜봐 주었다. 날이 잘 선 칼로 잘라낸 물건의 단면이 그러하듯 그분의 베어진 삶의 단면은 보란 듯 깔끔하고 잡티 하나 없었다.

장례는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나로선 재작년부터 시작해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그리고 시어머님 이렇게 연속 3년째 치루는 장사다. 일을 치룰 때마다 어느 정도 탈진하고 어느 정도 늙고 어느 정도 나도 잠깐 죽는 느낌이다. 상을 치루는 동안 죽음은 너무나 가깝고 현실적이며 한순간이다. 칼로 무우나 양파를 단숨에 자르듯, 죽음이 삶을 한 칼에 베어내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생은 그 단면을 최대한 드러낸다. 생생하게 드러난 삶의 단면은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연속성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죽음과 만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은 정지한다. 삶과 죽음의 싸늘한 차이는 결국 한 번의 칼질만큼 순간적이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 돌아가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꽃잎이 다 지고 있다. 새로 산 칼은 아직 써보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이 칼을 10년 20년 어쩌면 시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평생 쓰게 될지도 모른다. 시어머님이 안 계시니 이제 집안의 제사는 내가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칼로 어쩌면 시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평생 제사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 분이 그러셨던 것처럼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수많은 생명에 칼질을 할 것이다. 나의 칼질로 생명이 끊어진 수많은 것들은 칼질에 의해 다시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 나의 가족들은 내 칼질로 탄생한 수많은 것들에 의해 생을 살아갈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았던 칼은 결국은 생명을 위한 칼이 될 것이다. 파랗게 날을 세워, 나는 살아있는 생을 위해 칼질을 할 것이다.


  

<한국산문 2013.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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