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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글쓴이 : 박유향    15-11-17 13:18    조회 : 3,750

 

11월

 

박유향

 

 

11월이 되면서 계속, 11월이구나 11월, 이라고 생각을 했다. 별다른 뜻은 없다. 왜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일 년 중 다른 달은 안 그러는데 해마다 11월이 되면 마치 산달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린다. 11월이네 11월.

11월이 나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세워놓은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아니다. 기념일 같은 것도 없고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냥, 11월이라니까, 라고 할 수밖에.

 

오래전 회사에 다닐 땐 11월을 무척 싫어했었다. 깊은 동면에 빠져 들고만 싶은 계절,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공휴일 하나 없이 빠듯한 30일. 늦은 가을, 행사 같은 것도 있을 리 없었다. 출근길은 부쩍 어두워졌고 겨울옷 입기가 부담스러워 가을 옷을 입고 나가면 소름이 쭉 솟을 정도로 추웠다. 차고 메마른 날씨, 긴 겨울을 예고하듯 잔뜩 내려앉은 공기. 햇살은 따뜻하기는커녕 냉랭하고 싸늘했다. 해는 짱하고 나는데 마른 바람이 건물들 사이로 불면 몸의 한쪽이 무언가로 낮고 느리게 베이는 느낌이었다. 푸석푸석한 낙엽 부스러기가 거리에 날리는 것을 보면 자꾸만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고 싶었다. 깊은 가을, 연말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그저 묵묵히,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하는 달.

그런데 왜 그 싫었던 것들이 이렇게 오래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까. 싫다 싫어 하면서도 그 드라이한 서정에 제법 낭만을 느꼈던 걸까.

 

그 시절 11월의 기억 한 가지.

11월 어느 날 오전, K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강남의 한 지하 설렁탕 집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녀가 헤어지는 마당에 설렁탕이 웬 말인가 싶지만, 아마도 당시엔 이별이고 뭐고 간에 춥고 배고프니 뜨듯한 국물이나 먹고 보자 생각했던 것 같다. 좀 이른 시간이라 식당엔 손님이 없었다. 난방도 안 되어 있었다. 냉기가 흐르는 홀에서 아주머니들 몇 명이 말없이 왔다 갔다 하며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당 벽엔, '설렁탕의 유래'에 대한 글이 걸려 있었다. 조선시대 남대문 시장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먹으로 남대문 시장을 그린 그림도 곁들여 있었다. K와 난, 설렁탕을 기다리는 동안 그 글을 보면서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뜨거운 설렁탕이 상에 나왔을 때도 우리는 설렁탕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설렁탕을 먹으면서도, 계속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깍두기 국물 튀어가며 대화를 했다. 식사가 끝날 때쯤엔 설렁탕의 유래에 대한 각자의 견해와 철학까지도 피력할 수 있을 정도로 심도 깊게 토론을 했다.

식당을 나와선 K는 나한테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나는 "회사"라고 짧게 대답하곤 곧바로 헤어졌다.

회사에 오니 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무실이 비어 있었다. 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던지고, 책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영문 모르는 후배가 흔들어 깨웠다. 그사이 부장도 들어와 뒤에 앉아있었다. 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 안 좋으면 일찍 들어가라"고 말했고, 나 역시 무덤덤하게 "괜찮다"라고 대답하곤 책상 위 종이더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이후로 K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후로 11월이면, K도 아닌, 설렁탕도 아닌, 바로 그 잘난 설렁탕의 '유래'가 잠깐씩 생각난다.

그날, 11월의 공기만큼이나 메마른 이별을 했던 날, 예의 그 차고 건조한 11월이었다. 그날도 낙엽 부스러기가 거리에서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냉랭한 햇살이 마른 바람 속에서 싸늘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2014. 11.

    

 

(문학사계 2014년 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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