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뱅이
오래전 한여름, 내 생일날 이었다. 퇴근 무렵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뭐하니.
아무것도 안 해.
미팅할래?
야, 오늘 내 생일이거든.
알아. 그러니까 미팅하라구.
하긴, 그러니까 미팅하면 되겠구나.
친구가 다니던 S그룹 같은 부서 동료라고 했다. 회사 부근 을지로로 오라고 했다. 그러지 뭐. 인심 좋게 대답하곤 꾸역꾸역 을지로로 갔다.
그다음 기억은 좁고 허름한 맥주집. 장식 없는 흰 벽에 유난히 밝은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테이블 위 큼지막한 스테인레스 냉면그릇엔 골뱅이와 파무침이 수북하게 담겨 있다. S그룹 직원들을 비롯한 인근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불판 위의 닭발들처럼 왁자지껄 앉아 있었다. 닭발들은 모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여자들은 대부분 수수한 사무실 복장을 하고 있다. 모두 한껏 떠들거나 와르르 웃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혹은 따르거나 골뱅이를 입에 넣거나 파 한 오라기를 입가에 매달고 있거나 수북한 파 무침 속에서 보물찾기 하듯 골뱅이를 골라내고 있거나 엄청나게 큰소리로 아줌마 여기요, 소리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와 친구는 한 무더기의 닭발들과 함께 있게 됐다. 설마 혼자 여럿을 만나는 미팅은 아니었을 텐데. 왜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좌우지간, 아마도 친구네 부서 동료였을 사람들 여럿과 함께 있게 됐다. 친구가 오늘이 얘 생일, 이라고 말했다. 모두들 우와~~하고 떠들썩하게 축하해줬다. 나도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과장되게 축하에 응했다. 다른 테이블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파처럼 흥분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골뱅이처럼 우울해 하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맥주거품처럼 즐거워 보였고 누군가는 형광등처럼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하필이면 생일날 그렇게 낯선 자리에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있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쓸쓸해 파무침 속에서 골뱅이를 건져낼 의욕조차 상실한 채 애꿎은 파줄기만 계속 집어 먹었다. 뭐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같이 놀 사람 없으면 집에나 갈 걸. 생일날 남의 회사 회식자리에나 끼어 있다니 이게 뭐람. 친구는 옆자리에서 ‘뭐가 어때’ 라는 표정으로 술만 마셨고 나는 더럽게도 맵고 쓴 파를 씹으며 고독과 쓸쓸함을 달랬다.
그리고 무더운 밤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혼자 우두커니 서있었던 장면. 그것으로 그날의 기억은 싱겁게 끝난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테레비전에 자주 나와 자꾸만 자기는 보통사람이라고 우기던 시절, 어쩐지 화려했던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초라하기도 하고 사실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던 젊은 날의 한 순간이다.
오늘, 한여름도 아니고 생일도 아니고 맥주도 골뱅이도 먹지 않았고 을지로도 안갔으며 친구의 소식도 듣지도 않았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불어서인가. 그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2016 한국산문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