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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은 두유 빛이었네    
글쓴이 : 소지연    17-10-12 05:57    조회 : 8,424


                                                   그날은 두유 빛이었네

 오월의 마지막 주, 내가 탄 택시는 동호대교 위를 달리고 있다. 봄 같지 않게 찌푸린 하늘과 다리 아래 술렁이는 회청색 물살들이 금세라도 소나기를 내릴 것 같다. 그때 별안간 기사 아저씨가 인생 고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백옥 같아야 할 제 인생이 그만 모호한 색깔이 되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분의 뒷모습은 그의 고백만큼이나 쓸쓸했다. 그 난데없는 빛깔 타령이 어느 날 내가 보았던 두유 빛의 곰국을 떠올릴 줄이야.

 나에게도 사춘기시절, ‘ 내가 꿈꾸는 매일은 새하얀 도화지위에서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 점 티끌 없는 그 위에서 펼쳐지는 세상에는 깨뜨릴 수 없는 평화가 있으리라 여겼다. 사모하는 영어 선생님은 범접할 수 없는 동화 속 말 탄 왕자여야 했고, 한밤에 나누던 내 짝과의 편지는 거짓 없는 마음의 증표여야 했다. 열다섯의 소녀들은 새로 씌운 이불 호청이나 풀 먹인 교복의 칼라처럼 순백이어야 해서, 우리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하얀 얼굴에다 우리만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푸르른 하늘은 지고한 미소로 우리의 염원에 대고 속삭여 주었다, 그런 꿈은 우리 곁에 영원할 수 있다고.

 그때의 소녀는 어른이 되었고 그때의 백지도 파스텔 톤으로 채색되었지만, 단 한 가지, 즐겨 먹던 친정집 곰국의 투명한 빛깔만은 여전히 남았다. 학창 시절 고향집 식탁에 앉을 때면 놋대접에 담겨 나오던,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던 그 우유 빛 말이다. 깐깐하던 할머니로부터 어머니에게로 전수 되어 왔던, 친정집 곰국의 기름기가 말끔히 걷힌 표면에는 재료들이 융합하여 완전히 용해되고 난 후의 청정함이 있었다. 후추 없이 소금만 약간 넣어 후루루 마시면 입천장에 남아도는 그 맛이 깨소금처럼 고소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께 먼저 큰 그릇을 드리고, 오빠와 남동생들 넉넉히 부어주고, 남는 것은 엄마와 나와 여동생에게 반 그릇씩 돌아왔다. 그 때 그 맛은 백색 종이위에 그려진 새파란 하늘을 닮아 있어, 나는 행복한 입맛을 다시며 한참씩 밥상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고집스런 그 곰국 맛은 훨씬 더 어른이 되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타지음식에 지쳐 한국 식당을 찾았을 때에도 곰탕 메뉴는 시키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 하얀 빛깔에 대한 기억의 보고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몇 해만에 고국을 찾은 무더운 여름 날, 추억의 맛을 찾아 친정집을 향할 때였다. 공항에서부터 되살아난 내 사춘기가 옛날 그림 하나를 꺼내보려는 순간, 그 속에서 완벽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초췌한 환영이 되어 힘없는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소녀 적 꿈이 머무르고 싶던 최고의 예술품, 최상의 곰국을 닮았던 분이 아닌가.

 대문에서부터의 스산한 기운과 정원을 에워싼 회양목의 신음소리가 내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 같다. 현관문을 여니, 마루 한가운데 침대 위에는 예전 그 초능력자 같던 아버지가 지금은 귀가 잘려나간 고흐의 초상화가 되어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나던 해에 풍을 맞아 그리 되셨다고 한다. 내게 온전한 작품으로 기억되어야 할 그 분은, 놀랍게도 자연의 섭리에 몸을 내주며 차츰차츰 퇴색되어 왔던 것이다. 섬세하던 그는 이제 영혼마저 흐려졌는지, 초점 없는 눈빛이 썰렁하기만 했다.

 흐트러짐 없이 대화의 상대에 집중하던, 예리한 그 눈빛은 어디로 갔을까. 항시 있으리라 믿었던 그와의 그 자리는 한 낮에 잠깐 왔다 사라지는 빗줄기 같은 것이었을까. 넋이 나간 듯 점심상을 받았을 때, 간병 아주머니가 들고 나온 개다리 상에는 친정집의 곰국이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오래 만에 딸을 만났으나 반가움도 잊은 듯 아버지는 수저위의 죽을 반절은 흘리고 계셨고, 힘이 빠진 어머니와 마주 앉은 나는 옛날의 곰국을 찾아 숟가락을 휘저었다. 그런데 고대했던 빛깔이 아닌, 이번에는 걸러지지 못한 불순물이 엉거주춤 연회색으로 떠돌고 있지 않은가. 친정집 곰국은 언제나 깨끗해야 한다는 나의 환상은 그만 깨어지고 말았다. 허기졌던 나는 실망스런 마음에도 한 그릇을 다 비웠으니, 하얀 빛을 좋아하던 내 취향도 그때 함께 고개를 숙였으리라.

 중년을 넘기면서부터 하나의 도화지로 못 박혀 있던 나의 고집은 여러 갈래의 그래픽으로 나뉘어졌다. 여러 번 끓인 곰국도 때로는 친정집 맛으로, 혹은 다른 그림이 되어 밥상 위를 장식해왔다. 어느 봄날이었을까. 시아버님을 하직할 즈음엔, 한 번 더 최상의 곰국을 끓이려고 안간힘을 썼으니, 마지막으로 순수의 한 가닥을 넣어 그 간의 애증을 녹인 하얗디하얀 빛깔을 선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경건하고 싶던 나의 솜씨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그만 두유 빛을 띤 곰국을 끓여 내고 말았다. 어쩌면 애틋한 순정과 빛나는 열정을 다 한다 해도, 우리의 삶은 온전히 우리가 원하는 색깔로 엮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이번 여름 해외에 있는 아이들 부부를 만났을 때에도 곰국을 끓일 기회가 있었다. 여독에 지친 내가 기대했던 빛깔을 내지 못했는데도, 식구들은 의외로 반가움이란 양념을 뿌려 어느 때 보다 맛있게 들이켜 주었다. 그 날 먹은 곰국은 특별한 맛의 두유 빛이었을까. 그간의 그리움과 앞으로의 다독임이 함께하던 가족 간의 해후가 실수를 잠재울 수 있는 단단한 무기였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내내 제3 문화권에서 생활하다 마침내는 해외파가 되어버린 아이들과, 못다 한 인륜의 수레바퀴를 돌리러 고국에 다시 자리한 우리부부! 이것이 우리 가족의 현주소다. 우유 빛이나 두유 빛에 담긴 옛 어른들과의 시간도 돌이켜보면 생의 고귀한 빛깔이었듯이, 이제 아들딸은 그들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때로는 서로의 행복마저도 색 다른 모습으로 나누어 갈지 모른다.

그래서였다. 여행하는 내내 쓸쓸하던 택시 기사의 뒷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말해 주고 싶었다, 한번쯤 두유 빛 곰국을 끓여보지 않겠냐고.

 

<<한국산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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