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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을 받으며    
글쓴이 : 공인영    12-05-14 16:25    조회 : 4,007
 
 

씨앗을 받으며
 
 
 
  가을이 반쯤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욕심 없는 꽃들은 핀다.
헐렁한 생각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는 길에 일층 베란다 앞에 잠깐 쭈그리고 앉았다. 이 며칠 가을비에 다 져버린 듯 까칠하게 말려있던 채송화 꽃잎이 도로 함박 웃는 걸 보니, 모처럼 눈부신 아침에 그것들도 따뜻한 볕이 그리웠나 보다.
  연보랏빛 소국과 함께 연지 몇 닢 주름잡은 듯 앙증맞은 채송화는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꽃이다. 소름처럼 수시로 돋던 그리운 알레르기다. 몇 번의 이사 길 그 어느 골목에선가 슬그머니 놓쳐버려 통 볼 수가 없더니 경비 아저씨 걸음에라도 묻어왔는가. 슬금슬금 나타나고 언뜻언뜻 보여 오늘 내 앞에 앉은뱅이로 바글거리는 게 이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
  아무렴 꽃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으랴.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는데 바쁜 내 하루하루가 그것들을 헛눈질했을 터이다. 시간을 돌아 다시 이곳을 통과하는 계절처럼 어쩌면 채송화도 길을 물어 나를 찾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면 나도 이제 다시 제자리에 온 걸까.
  비단 헝겊 한 조각씩 잘라 얹은 듯 채송화 빛깔들이 참 곱기도 하다. 자주와 다홍 또 노랑빛 머리 위로 문득 씨 주머니 몇 개가 여문 채로 달려 있다. 아, 갑자기 나는 설레고도 조급한 마음이 된다.
 "얼른 저 씨를 받아둬야 해."
 "이별의 끝이 언제나 텅 비어야 한다면 산다는 건 너무 쓸쓸해. 다시 만날 정표 하나쯤 간직하고 싶어."
 윤기 나는 까만 모자를 톡 하고 건드리자 모래알 같은 씨들이 사라락 흩어진다. 하나라도 흘릴까 받치던 손 오므리고 또 다른 엄지와 검지 끝에 바동대는 것들마저 알뜰히 털어 낸다. 생명을 품어서일까 벌써부터 꼬물거리는 듯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오늘 이 꽃의 정령들이 홀연히 내게로 와 주었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다가가면 언제라도 손 잡으며 와락 끌어안는 몸짓만이 아닐진대, 오늘처럼 일방적인 내 행위가 혹 억지는 아닐까.무릎에 채이는 바람으로 날리다가 추억이 더 절실한 누군가의 발 밑에서 싹을 틔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늘 마주치던 일상이 어느 날 문득 낯설어지는 것처럼, 수많은 관계와 인연을 맺던 당연한 내 삶이 가끔씩 두려워진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길 꿈꾸면서도 마음은 또 끊임없는 애착과 관심에서 슬그머니 벗어나고 싶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과 맘에 들어 사게 된 가구 몇 개와 털 복숭이 개 한 마리. 그리고 얄팍한 책들과 마침내 오늘, 이 긴 추억을 넘어 온 채송화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에 의미를 달아 나와 관계 짓는 속엔 불가사의한 인연의 아주 깊은 뜻이 있으려니.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소중한 줄 내 진심으로 깨닫는 날이 오면 좋겠다.
  씨앗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이 인연 하나를 맺는 일이며 책임을 갖는 일이다.내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 아닌 누군가의, 무언가의 가장 귀한 의미에 관여한다는 게 갑자기 벅찬 감동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작고 가녀린 그 모습에 더 애틋이 품어지던 꽃, 아무리 봐도 저렇게 예쁜 얼굴들 또 없다. 고것들 쓰다듬던 소녀의 머리에도 이제는 순종을 서약하듯 흰 꽃이 돋아나건만, 앉은뱅이 저 녀석들은 세월만 먹었지 나이는 몰래 뱉어냈는가 보다.
  씨앗을 받고 일어서는데 등을 훑고 가는 바람 한 줄기 이번엔 제법 심술궂다. 반쯤 열린 작은 손을 얼른 오므린다.
' 씨앗 여기 없...........다.'
 
 
                                                     범우사 <책과 인생.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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