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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잣 한개에 한해의 무사를 담아    
글쓴이 : 김요영    12-05-14 17:24    조회 : 3,379
잣 한 개에 한 해의 무사를 담아
김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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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불을 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십 오년동안 정월대보름을 보내면서 늘 마음은 있었지만 혼자서 해보기에는 흥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유난을 떠는 거 같아 매년 그냥 생각만으로 때웠었는데 올해는 문득 실행에 옮겨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셋트로 구입한 부럼 중에 피잣은 한 옹큼도 되지 않았다. 이것도 중국산인가 싶게 때깔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중 제법 큰 놈을 골라 딱딱한 겉껍데기를 살짝 깨물었다. 입 속의 감촉으로는 아마도 두 동강이가 났을 게 틀림없었다. 오랜 세월 사용치 않았더니 껍데기 깨는 기술도 녹이 슬었는지 대여섯 개 중에 겨우 하나만이 제대로 성공했다. 뾰족한 쪽을 옷핀에 끼어 속껍질을 신생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벗겨내니 비로소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서둘러 불을 붙이자마자 아래쪽으로 두어 개 가지를 치며 제법 타오르는 모양새가 올해는 아무 탈 없이 운이 좋을 거라고 암시를 주는 것 같아 혼자서 기분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잣불에 대한 기억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친정 부모님들은 해마다 대보름 전날 밤 식구들을 모아놓고 관습처럼 쭉 해오셨을 터였다. 우리 자매들이 고만고만한 나이로 어렸을 때 엄마는 대보름 며칠 전부터 부럼을 준비하셨다. 호두랑 땅콩도 넉넉히 준비하셨지만 특히 밤은 늘 한말들이 자루 째 사놓으시고는 우리의 근접을 막고자 찬장 높이 숨겨 두셨다. 결코 미리 내놓지는 않으셨기에 정말 대보름날을 목 빠지게 기다렸었다.
드디어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열 나흗날 점심을 먹고 나면 엄마는 매년 사용하는 나무로 된 그릇에 싸우지 않도록 똑같은 개수로 부럼을 나누어 주시곤 하셨다. 두께가 손가락 한마디는 됨직한 검은 옻칠을 한 목기는 요즘 나오는 넓이 이십 센티쯤 되는 뚝배기를 연상하면 딱 들어맞는다. 제법 수북하게 담겨진 부럼을 안 뺏기려고 언니와 나는 다락에 올라 숨어서 먹곤 했었는데 밤 두개랑 호두 한 개랑 물물교환도 했었다. 아마도 언니는 밤을, 나는 호두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하나 먹고 나서는 곧 개수 확인이라는 절차를 지겹지도 않게 한 걸 보면 부럼은 정말 귀한 먹을거리였나 보다.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간혹 동네 공터에서 쥐불놀이를 목격 할 수 있었지만 한옥이 밀집한 곳이라 화재의 위험 때문에 어른들은 반겨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집은 자매들뿐이라 쥐불놀이는 관심 밖이었고 오직 달이 휘영청 뜨면 행해지는 잣불 켜는 시간만 기다렸다. 모두 모이라는 아버지의 부름에 저마다 부럼 바구니를 품에 안고 안방으로 찾아들면 둥그렇게 앉아 각자의 바구니에서 제일 실하고 통통한 잣을 골라 속살을 보이기에 바빴다. 그리고 몇 번인가의 실패 끝에 선택된 고운 자태의 잣은 주인의 운세를 짊어지게 된다.
성냥불로 붙여진 잣은 겉모양이 훌쭉하게 말라 좀 더 실한 것을 고르지 못한 질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세 좋게 타오르는 경우가 종종 생겨 겉모양만 보고는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과 얼마나 흡사한지.
너무 작아 불이 붙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되던 것도 속에 기름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은 위 아래로 가지를 치는 것도 모자라 탁탁 소리 내며 불꽃까지 튀는 이변도 생긴다. 그러면 아버지는 운수대통할 거라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다. 물론 재미로 하는 놀이였지만 은근히 내 잣불이 제일 잘 타주었으면 하는 욕심을 부렸었다.
시집오고 처음 맞는 대보름날, 내심 잣불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낌새가 안 보여 슬쩍 운을 띄웠더니 그런 놀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말 서운한 마음에 친정에 전화를 거니 모두 내 생각을 하며 잣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고 해서 또 한 번 울적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이십 오년을 그냥저냥 보내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올해 비로소 잣불 시도를 해본 건데 어릴 적 서로 먼저 하겠다고 열심히 잣을 까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뻐근해졌다. 친정아버지는 지금쯤 먼데서 흐뭇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잣이 훨훨 잘 타올랐으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덕담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잣불이라는 집안의 작은 행사로 결속을 다지고 한해의 행복을 염원했던 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딸들의 머릿속에 당신을 기억해줄 따뜻한 추억이 될 줄 아셨을까.
오랜만에 화염 속 잣 한 알에 모든 소망을 담아 한 해의 무사를 빌어보았다. (2010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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