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의 햇볕도 아까운데
김요영
때 이른 더위를 떨치는 유월의 날씨치고는 간간이 산들바람이 분다. 서로 반대쪽인 부엌과 거실 베란다 문을 열어 두면 한여름에도 맞바람 때문에 시원하다. 덕분에 아침에 병아리 눈물만큼 비추다 옆 라인으로 슬쩍 도망가 버리는 햇빛의 도움이 없어도 바람결에 빨래는 제법잘 마른다. 그러나 어쩌다 빨래가 늦은 날이면 그나마 토막난 햇빛도 구경 못하고 그늘에서 바람에 위지하여 말려야만 한다. 그럴 때면 하루 종일 베란다에 넘칠 만큼 태양을 안고 사는 옆 라인 주민들이 새삼 부러워진다.
모름지기 빨래란 손으로 싹싹 비벼 빨아 흰 것은 푹푹 삶아 볕 잘 드는 마당에다 구김살 없이 말려야 제격이다. 게다가 종일 햇빛을 본 빨래들은 소독도 겸하게 되니 그 상쾌함이란 노동의 피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후부터 그런 건 언감생심 꿈조차 꿀 수 없으니 이런 화창한 날은 더욱더 햇빛이 미치도록 아까울 뿐이다.
비좁은 집이었지만 시집 온 후 이십년을 살았던 정릉 집 뒤란 장독대는 서너 개 계단을 올라야만 되는 높이여서 그늘이 질 염려가 전혀 없었다. 그 곳에 빨래를 널면 바람과 햇볕이 적당히 조화를 이뤄 건조의 기술을 발휘하니 뽀송뽀송한 옷감 본래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곤 했다.
이년 터울로 태어난 두 아이들의 기저귀는 따로 삶지 않아도 언제나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이 났었다. 그래도 노파심에 이틀에 한번 꼴로 정성들여 삶아 집 옆 공터를 가로질러 나무에 묶어 놓은 빨래 줄에 줄줄이 널어놓으면 키가 다른 기저귀들은 바람에 나부껴 파란 창공과 한 몸이 되어 마치 지나가는 구름 같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빨간 색이 선명한 마른 고추가 하얀 빨래들 아래 자리를 잡는다. 돗자리를 깔고 고추를 골고루 펴서 만져 놓으면 눈부신 태양과 하얀 빨래, 그리고 햇볕에 투명한 속을 온통 보인 게 부끄러운 듯 더욱 빨개진 녀석들의 조화가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그런 가을볕에 이삼일 일광욕을 하면 고추는 금새 부서질 듯 바싹 마른다. 조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렇게 말린 고추는 가루로 빻아도 정말 청청하다.
때로는 하얀 빨래 대신 이부자리를 널 때도 종종 있었다. 요나 이불은 아무리 얇다 해도 마당으로 안고 나오려면 힘에 부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뜨거운 태양은 결코 그들을 배신한 적이 없다. 한나절 널어놓으면 무명인 겉감은 포실 포실해지고 안쪽의 솜은 공기를 잔뜩 머금어 부풀어 올라 푹신한 잠자리를 약속해 주곤 했다.
그렇게 소나무 숲을 껴안고 살다가 이사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파트가 단지 살기가 편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 회색 마천루 사이를 비집고 겨우 얼굴을 드러내는 조각하늘과 콘크리트로 도배된 숨 막힐 듯한 공간을 간신히 비쳐주는 태양에 감질나 버린 나는 은연중에 옛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당이 있고 솔바람이 지나가고 흙 내음이 땅 끝에서 올라오고 딱 필요한 만큼만 알맞게 내려 쪼이던 햇빛을 다시 돌려받고 싶어졌다.
정 붙이려고 노력을 했건만 내가 살집이 아니라는 느낌만 더해지는 아파트를 조만간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 집 식구들은 안다. 다만 그 때가 언제가 될까 하는 미지수를 남겨 놓고 있을 뿐이다.
불현듯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니 그 새 맞은편 아파트 어느 집에서 이불을 베란다에 내다 널었다. 넓찍한 안마당에 빨래줄을 걸고 두루두루 널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 나랑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나 필요한 곳이 있으면 살짝 그곳에 머물러 주곤 하던 햇빛이 요즘의 나에게는 아주 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이 여름에도 한 뼘의 햇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온 몸으로 느끼며 산다.
그리고 너무나 귀중해서 자칫 그냥 지나쳐 버리는 무한대의 햇볕이 항상 아깝기만 하다.
(200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