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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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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모    
글쓴이 : 김은희    12-05-14 20:12    조회 : 3,632
인쇄와 제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내 책을 따끈하게 선물하려고 간단한 헌사를 쓰고 이름 옆에 도장을 찍는다. 자마노(紫瑪瑙)에 굵직한 서체로 내 이름이 부드럽게 새겨져 있다. 현대에는 서명이 도장(圖章)을 대신하고 있지만 나를 나타내주고 확인시켜주는 도장이 살갑게 다가온다. 도장은 신장(信章), 인(印), 인장(印章)이라고도 하는데, 그 역사는 기원전 5000년경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엔, 점토판을 이용하여 스탬프처럼 찍는 형태였단다. 한반도에 도장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부여의 역대 왕들이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옥새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도장을 사용하는 나라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이라는 사실도 특이했지만, 중국에서는 그 용도에 따라 도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성명인(姓名印) 개인의 이름을 표시하는 도장. 가장 일반적이다.
표자인(表字印) 개인의 字를 표시하는 도장.
신첩인(臣妾印) 신하, 비빈(妃嬪), 궁녀 등이 황제에게 문서를 올릴 때 사용한 도장.
서간인(書簡印) 편지를 보낼 때 사용.
총인(總印) 이름 및 출신지를 표기한 도장.
회문인(?文印) 이름을 표기하되, 문자를 반시계 방향으로 배열한 것.
내 도장은 ‘성명인’인 셈이다. 이 도장은 볼수록 예쁘다. 이제까지의 내 도장들은 둥근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네모다. 막연히 더듬더듬 글의 세계로 들어서는 제자들에게 등단 선물로 이 도장을 선물해주시는 분의 삶처럼 엣지 있는 네모…….
대부분의 사람들은 둥글이를 예찬한다. ‘둥글게 살아라, 둥글게 넘어가라, 각지지 않게 둥글게, 둥글게’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암묵적으로 나만의 ‘각’은 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분은 한 평생 자신의 각을 세워 한 길을 걷고 계신다.
러시아에서 발간된 <<상징사전>>을 보면 네모는 ‘질서, 평등, 진리, 정의, 지혜, 명예, 솔직, 대지’를 상징하는 숫자 4와 연관된다. 네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은 세상의 네 방향, 사계절 등을 의미하고, 또 인간 연령의 네 시기인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의 네 요소인 불, 물, 땅, 공기를 의미하고, ‘희노애락’ 네 가지 인간 본성의 결합이기도 하다. 사각형은 생명력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원’에 대한 대립으로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각은 닫힌 공간의 완전한 유형이고 세계를 상징하여 사원, 피라미드, 탑 등 숭배를 목적으로 한 수많은 건축물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원, 교회 등을 건축할 때 하늘을 상징하는 원과 대지를 상징하는 사각을 결합해서 네모 속의 원이나 원 속의 네모를 변형해서 건축했다. 사각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과정을, 원은 지상 위의 최상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나타내는 알레고리다.
그래서 네모하면 말레비치의 <흰 바탕에 검정색 사각형>(1915)이 떠오르는 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회화의 슈프레마티즘(절대주의)’을 표방하며 전시된 39점의 작품들 중 하나였다.이 때 ‘입체주의에서 절대주의로’라는 유인물이 발표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슈프레마티즘’이 인간상황의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암시하고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내팽개쳐 버리기 위해서 말레비치는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서의 ‘사각’과 가장 추상적인 색으로서의 ‘흰색’에 의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말레비치는 슈프레마티즘의 기조가 ‘흰 사각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3년 말인데, ‘자연의 수동적 형태에 대한 능동적 인간 창작 승리를 나타나는 조형물’로서 <태양에 대한 승리>라는 입체주의 오페라를 위한 무대 장식이었다. 이것은 검은색과 흰색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사각형 속의 사각형이었다. 이 사각형 이후에 그는 후대에 가장 잘 알려진 ‘사각형들’의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1935년 말레비치는 레닌그라드에서 중병을 앓다가 죽게 되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슈프레마티즘적인 관’에 넣어 화장을 했고 유골함은 넴치노프카 마을 근처 화가가 사랑했던 참나무 밑에 묻었다. 무덤 위에는 검은 네모를 형상화한 입방체의 콘크리트 조형물을 세웠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유실되었다. 후에 그 마을에 무덤이 복원되었고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인간의 가장 큰 유산인 책이 네모이듯이 네모는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과정의 총체이자 인간 노력의 상징인 것 같다. 말레비치가 그토록 네모에 매달린 것도 태양과 하늘을 상징하는 원에 대한 인간 노력의 절대화를 형상화하고픈 것이었으리라.
사각형 책에 찍힌 네모 도장을 다시 본다. 도장을 뜻하는 노어가 ‘페차티’라는 것을 떠올리자 미소 짓게 된다. 페차티란 말은 1) 도장, 인장, 스템프, 2) 봉인, 3) 흔적, 자국, 4) 인쇄, 5) 활자, 6) 신문, 간행물 등으로 뜻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네모난 ‘간행물’로 ‘인쇄’된 내 ‘흔적들’에 ‘도장’을 찍으며 ‘활자’의 세계로 들어선 내 과거의 ‘봉인’도 뜯어낸다. 봉인이 뜯긴 내 과거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사람에게 다가가리라. 이 책이 안기게 될 다정한 손과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닫혀져 단정히 꽂히게 될 네모난 책장이나 거실 언저리도 상상해본다.
글의 세계로 들어선 제자의 앞길을 네모 도장으로 동행해 주시는 분의 뜻도 가늠해본다. 자꾸만 둥글어지는 내 삶을 돌아보고 글에서라도 조금은 ‘각’을 세워보라는 것은 아닌지……. 책장에 꽂힌 말레비치의 도록에서 ‘사각형’들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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