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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명정 가는 길    
글쓴이 : 송경미    12-05-14 23:18    조회 : 4,497
                                                어명정 가는 길
                                                                                                                              송 경 미
 
 어명정! 8월 삼복더위의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로 계곡으로 시원한 곳을 찾아 떠나느라 꼬리에 불을 단 쇳덩어리들은 죄다 동쪽으로만 몰려 영동고속도로는 명절 때보다 더 북새통이다. 어명정은 여기서라도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 싶어 산으로 향한 ‘강릉 바우길’에서 만난 이름이다. 한자(漢字)가 없으니 우물인지 정자인지 모르겠고 어명을 내렸다는 것인지 받았다는 것인지, 이 산골짜기까지 임금이 납신 적이 있었는지 사뭇 궁금증을 가지고 길을 찾아 나섰다.
 ‘어명정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소설가 이순원씨와 산악인 이기호씨가 개척한 강릉 바우길 열 한 개 구간 150여km 중 제 3구간이다. 대관령 유스호스텔에서 보현사 입구 주차장까지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2km남짓 올라가 차를 세우고 표지판을 보니, 초입부터 경사가 가파르고 좁은 황톳길이 실지렁이처럼 가늘게 구불거리는 게 만만치 않다. 입구에서부터 요리조리 나무를 피해 난 경사진 오솔길을 오르다가 백 미터쯤 지나면서 시야가 확보되는 진짜 숲길을 만난다.
 여기서 부터가 이 길의 진수다. 어명을 받은 당당한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솔향과 풀향기에 취해 걷는데 영겁의 세월 동안 쌓여 썩은 낙엽을 깔고 있는 숲길은 부드럽다 못해 푹신푹신하다. 하늘을 향해 수 백 미터씩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들은 오솔길 양편으로 늘어서 말없이 걷는 나를 지긋이 지켜보는 폼이 모두 내 편들이다. 그렇게 마음 편안할 수가 없다.
 멀리서 본 산은 중턱에만 자욱한 안개구름에 싸여 있었지만 숲 속은 어릴 적 숨바꼭질 하다 얼떨결에 숨어든 짚더미 속처럼 아늑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맨 살에 닿는 이슬비의 감촉은 무더운 날씨에 청량감마저 주더니 빗방울이 점차 굵어진다. 서울에서라면 피할 곳을 찾아 이리 저리 뛰었겠지만 온 몸으로 고스란히 맞는다. 키 작은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경쾌한 연주를 들으며 비와 함께 자연에 동화되어가는 편안함에 나를 온전히 맡기고 뚜벅뚜벅 걷는다.
 나는 분명 어명정을 향해 걷고 있는데 어명정은 어디에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시야를 멀리 두면 모든 것이 희미하고 길이라곤 없어 보이지만 내 발 앞은 똑똑히 보이는 것이 마치 인생길 같다. 내가 지나온 길도 앞으로 나아갈 길도 선명하지 않으나 내 뒤에도 앞에도 늘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한 걸음씩 천천히 걷다보면 태초부터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숨이 턱까지 차는 길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수고하십니다!”라는 홀로 걷는 아저씨의 경쾌한 한 마디에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이의 기쁨과 만족감이 묻어있다. 두 시간 남짓 비지땀과 빗물에 젖어 걷다 보니 잘 닦인 임도를 돌아 어명정(御命停)이 나타난다.
 
 아하! 정자였구나!
어명정이 세워진 곳은 2007년 11월 29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할 금강소나무를 벌채하기에 앞서 역사상 처음으로 교지를 받은 후 산림청장과 문화재청장이 산신과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이다.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기 위해 그 때 벌채한 크기 90cm의 대경목 금강소나무 그루터기를 가운데에 두고 정자를 지어 어명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어명정에 올라 유리로 덮인 금강송의 그루터기를 내려다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이테는 유난히 추웠던 겨울, 눈보라에 웅크렸던 몸을 더 단단하게 껴안고 지낸 시절과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과 응달진 북쪽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나면 더 단단한 내공이 쌓이는 사람 모습과도 같다.
 그 나무가 서 있던 모습을 그려본다. 어림잡아 400여 성상을 강원도 골짜기 높지막한 명당자리에서 독야청청하던 낙락장송의 그 우아하고 당당한 위용을 뽐내던 모습과 하늘만 바라보며 오롯이 자란 고고한 자태로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서 있었을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무 그루터기에는 3.1운동, 6.25전쟁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수 백 년 동안 말없이 우리 역사를 지켜보았던 그 소나무는 이제 광화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또 다시 수백 년, 수 천 년 우리를 지켜 볼 것이다.
 바로 이 나무로 광화문을 복원하고 있는 신응수 대목장(도편수)은 “나무를 내 살같이 생각해야 한다.”면서 노송을 자를 때마다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고사를 지낸 뒤 나무의 삷을 위로하는 축원을 한 후 도끼를 들고 ‘어명이오.’하고 세 번 외친 다음 나무를 베는데, ‘어명이오.’를 외칠 때마다 나무 위를 쳐다봐야 한단다. 이는 나무와의 기싸움에서 지면 공사 때 사고가 나기 때문이라는데 이 의식 덕분인지 19년 동안 경복궁 등 궁궐 공사를 하면서 큰 사고 없이 광화문 복원 사업까지 마쳐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한다.
 지금 복원되고 있는 광화문은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될 것이라고 한다. 자칫 수입목으로 도배될 뻔한 광화문을 강원도 강릉, 양양 깊은 산속에서 수 백 년 동안 올곧게 자라 간택되어 온 소나무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궁궐 정문을 지키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내가 본 이 어명정의 금강송은 어디쯤에 앉아 있을까 꼭 가서 만나봐야겠다.
 내친 김에 더 올라갔지만 날이 흐려 동해바다는 볼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구름에 가린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바다를 눈을 감고 상상하는 것은 또 다른 선물이었다.
 
 내려오는 길은 한결 여유롭다. 나무들의 아름다운 자태도 누군가 걸어가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샛길들도 정겹기만 하다. 또 와야지, 자주 와야지 다짐하며 걷는데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풍경을 만났다. 폭목환상박피? 대체 이 어려운 말은 무슨 뜻인가. 사지를 벌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옷까지 홀랑 벗고는 무방비로 서 있는 이 나무가 바로 폭목환상박피(幅木環傷薄皮) 당한 나무란다. 위로 곧게 자라야할 나무가 옆으로 가지만 뻗어서 쓸모도 없는 것이 주위의 작은 나무들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니 껍질을 다 벗겨 내서 죽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 큰 나무는 지금 죽어가는 중이다.
 어이쿠! 내 인생 폭목환상박피 당하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며 묵묵히 걷다보니 어느새 등산로 끝이다.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이런 느낌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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