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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여름, 그리고 겨울    
글쓴이 : 박지니    22-12-28 21:08    조회 : 2,411

2018년 여름, 그리고 겨울

 

여기 우리 큰애, 둘째, 우리 딸, 막내, 그리고 손주들.”

어머, 얘가 이렇게 컸어? 요만했는데.”

얘가 그때 그 돌잔치 했던 그 앤가?”

아직 정정하시네. 저분은 누구시더라? 떠올릴 새도 없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무리가 다가온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꾸벅 인사하는 사이 가끔은 큰오빠가, 또 가끔은 작은오빠가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을 맞이하고 인사하고 보내고 문가를 흘낏한다. 스타킹 신은 발 몇 쌍이 들어선다. 기계적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데 내 앞에 머무르는 발길. 그제야 고개 들어 얼굴을 확인하니 낯익음을 넘어 그리운 얼굴들이다.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걸 깜빡했음을 밤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아버지, 어머니야 살아온 세월만큼 행사도 많이 치렀고, 오빠들도 각자 사업하는 동안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겠지만, 동창회조차 나간 적 없는 나는 하나하나 연락을 했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 연락해서 와 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그러면서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 하고 감탄할 뿐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모든 것이 낯설 때가 있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 생활하던 우리 집, 내 방, 내 침대인데 숨 쉬는 공기까지도 이질적이다. 마치 내 방에서 4차원의 공간 문을 넘기라도 한 것처럼 찰나가 수십 분이 되어 흘러버리고 물속을 부유하듯 모든 감각이 뭉툭하다. 그러다 눈 깜박이는 사이에 엉뚱한 곳에 도착하고 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때로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꿈인지 아니면 꿈이길 바라는 것인지 헷갈리고 만다. 여름에 꾸기 시작한 꿈은 계절이 바뀌도록 끝나지 않았다. 웃고 떠들면서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시공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1988년 여름. 아버지는 작은오빠 나이쯤이었고 막내고모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을 때이다. 그때 부모님이나 고모들은 어떻게 장례를 치렀을까? 신부님에게 아버지의 대세를 부탁하고, 가신 후에는 연령회장에게 연락하고. 딱 거기까지만 기억하는 나보다는 훨씬 성숙했음이 틀림없다. 장례가 끝난 후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해놓고 이듬해에 아차 싶어 또 연락을 넣을 뻔했다. 작은 폴립부터 심부전증까지 병을 앓을 때마다 이겨냈기에 암이라는 진단 앞에서도 견뎌낼 거라 믿었었나 보다. 믿음직해 보이지 않는 내 모습에 아직은 보내드릴 때가 아니라 여겼었나 보다. 병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도무지 아버지 같지 않아서,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으니, 그즈음이 지나면 별일 없었냐? 현관문을 열며 들어올 것만 같아서.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데 멀리 인영이 넘실넘실 춤추듯 미끄러진다. 다가오는 것일까, 멀어지는 것일까. 빛 속에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눈에 힘을 줘 가느다랗게 떠보아도 보이는 것은 꿈인지 망상인지 구분되지 않는 빛 그림자뿐. 산들바람의 휘파람 소리에 새 한 마리가 모래 위에서 스텝을 밟고 해수면이 춤을 춘다. 나뭇가지 박자 맞추며 이파리 흔들어대는 소리가 평화롭다.

아침 햇살을 받아 퍼지는 윤슬을 바라보며 눈앞이 흐린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이 흐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풍경이라고, 햇빛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수면이 눈이 부신 것이라고. 그러니 여기서 물방울 같은 것이 뺨을 타고 흘러도 그것은 아침이슬일 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낭비하기엔 앞에 펼쳐진 자연이 지나치게 아름답지 않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다가 좋다는 아버지는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물에 닿을 듯 말 듯 물 따라 걷다가, 성에 안 차는지 대뜸 물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가슴께까지 흠뻑 적신 후에야 뭍으로 나와서는 너도 앉아 있지만 말고 얼른 들어오라고, 바다에 왔으면 발이라도 담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내게 손을 흔든다. 햇빛 피해 그늘에 숨어 있노라면 식물도 광합성을 하는데 햇볕 좀 쪼이라 타박한다. 나는 지금 햇살 가득 받으며 물가에 앉아 있는데.

아버지 장례를 치른 해의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지만, 병원에 오가며 내내 실내에서 지냈던 나는 더운 줄 몰랐다. 해가 지나고 겨울에 어머니와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 생전에 함께 놀러 가곤 했던 그 바닷가에서 나는 홀로 앉아 울었다. 그동안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던 아버지 얼굴이 자꾸 생각나서. 그립고 그리워서. 그제야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모던포엠, 20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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