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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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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맛골이 사라진다    
글쓴이 : 김혜자    12-05-18 10:00    조회 : 4,175
   오래된 것들이 사라져간다. 아쉬움과 그리움이란 향기를 남겨둔 채.
   광화문광장의 새 모습을 보러가다가 재개발의 삽질이 발치까지 파고든 종로 뒷골목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다. 황량했다. 헐리고 파헤쳐진 ‘피맛(避馬)골’은 폐허가 따로 없었다. 주머니가 가벼울 때도 부담 없이 몰려다닐 수 있던 곳이었는데. 시끌벅적하던 밥집들은 공터로 변했고, 공사장 가림벽에 간간이 붙어있는 이전 안내문들만 씁쓸하게 눈에 띄었다. 그렇게 텅 빈 피맛골을 천천히 거닐며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짝사랑 작별을 나누었다.
 
   갈비탕이 맛있었던 한일관이랑, 손목에 난 물혹 때문에 몇 달을 들락거렸던 벌침할아버지 집도, 그 옆 중국집도 다 없어져 휑뎅그렁했다. 학창시절 백운대라도 오른 날이면 굳이 들렸던 청진동 해장국집까지 이 골목 저 골목을 한참 헤매고 다녔다.
   종로는 조선이 창건되고 서울로 천도하면서 맨 처음 만든 길이니 600여년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종과 눈요기도 되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당시 가장 큰 시전상가가 있고, 궁궐이 가까워 행세께나 하는 양반들의 나들이가 잦았던 ‘큰 길’이다. 그 땐 길에서 높은 벼슬아치를 만나면 아랫사람들은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표해야 했으니 속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래서 말 탄 양반들의 행차를 피해 아예 큰 길 양쪽의 좁다란 뒷골목을 애용하였으니 피맛골이렸다.
   목로주점과 국밥집이 연이어진 서민들 전용 뒷골목이던 피맛골.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국밥으로 허기를 면하고, 꺼이꺼이 애환을 나누고. 지금껏 그렇게 별 가진 것 없는 자라도 제법 어깨 펴고 큰 소리도 쳐보곤 한 곳이다.
길 건너로는 서양 유명한 사람이 설계를 했다는 아주 비한국적인 삼성증권빌딩이 우뚝 서있다. 그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휘황한 야경은 일품으로 알려졌지만 오랜 조선의 혼이 서린 종로 바닥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자리엔 옛 화신 백화점이 있었으니. 어제도 오늘도 갑부들 차지다.
   광화문 광장을 둘러보고 다시 피맛골 입구에 섰다.
   남아있는 건 유령처럼 보이는 세 집뿐이다.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버티고 있다했다. 어귀에 붙어있는 ‘열차집’과 ‘대림집’의 정상영업을 알리는 안내문이 그럴 수 없이 반가웠다. 해질녘 출출해지면 박물관 동료들과 곧잘 어울려 다녔던 곳이 아닌가. 밖으로 나앉은 화덕 위에 나란히 누워 온 골목을 진동시키며 배꼽시계를 요동치게 하던 생선구이나 열차집의 노릇노릇한 빈대떡을 맛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직 일러선지 빈대떡집은 흉가처럼 텅 비어있다. 벌써 냄새를 요란히 풍기고 있는 생선구이집에 앉으니 밥알 몇 개 든 숭늉부터 먼저 갖다 주었다. 삼킨 건 추억이었다.
   벽에는 대림집이 ‘맛집’으로 소개된 신문 기사를 오려붙여 놓았다. 누렇게 변한 색깔이 그 집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했다. 어깨 너머로 식당 사람들의 얘기가 들렸다.
“글쎄, 호미로 파다 손가락으로 후비다 그러고 있더라니까. 원 그러고서야 언제나 집을 지을지 모르겠더라.”
피맛골 문화재발굴현장 이야기인 듯. 온전하게 발굴하려면 행여나 유물이 손상될까봐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천 번의 붓질을 해야만 하는 고고학자들의 마음을 보통 사람들이 어찌 헤아리랴.
   식후 바로 옆 건물터 발굴현장으로 갔다. 가림벽의 좁은 틈새로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 국보급 이조자기 몇 점이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어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던 그곳이다. 아직도 발굴 작업 중이었다. 1m 정도씩 세 단계로 파여진 현장에는 몇 사람이 그야말로 흙바닥을 입으로 불어가며 호비작거리고 있었다. 아까 식당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말 할만 했다.
   무심코 지나치던 피맛골 아래 지층에서는 몇 백 년 전 삶의 흔적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현재는 단지 현재가 아닌 오랜 시간의 축적임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조선의 ‘타임캡슐’이었나보다. 우리는 지금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새로운 지층을 만들어가는 걸까.
 
   변신 중이었다. 종로 뒷골목은 깡그리 변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개발을 끝낸 곳은 새 고층빌딩 사이로 터널같이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는 ‘피맛골’이란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정말 무늬만 피맛골이지 ‘전혀 아니올시다.’다. 옛 정취도 살리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녕 우리의 얼이 서린 그런 걸 만들 수는 없을까.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고 허름했으나 허물없던 피맛골. 벌써 그곳이 그립다.
                                                                                                       《계간수필》2009년 겨울호 게재
                                                                                                       《선수필》 2010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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