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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사랑해    
글쓴이 : 김숙진    24-08-20 19:59    조회 : 3,267
1974년,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었다. 큰언니는 3년간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그동안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언니가 부엌 벽에다 온통 꼬부랑글씨를 빡빡하게 써 놓곤 밥하면서도 구시렁대던 모습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후 언니는 파독 간호사 자격을 취득을 위한 독일어 시험에서 일등을 해 나는 언니의 일등이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친구들이 묻지도 않는데 언니가 독일 갔다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 같았던 언니가 막상 떠나자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꼬꼬닭이 알 낳으려 용쓰는 소리를 낼 때면 언니는 총알같이 달려가 닭장 문을 벌컥 열고선 
  "우리 막내 간장에 밥 비벼서 줘야지”.  
  하며 알을 꺼내 와 프라이를 하고, 엄마가 아껴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간장에 싹싹 비벼 나만 주었다. 친구가 내 이마가 넓다며 ‘논산훈련소’라고 놀리면 
  “어머, 너 논산훈련소가 이렇게 작은 줄 아니?”, “너 공부 못하지?” 
  하며 무조건 나를 감싸주었다. 이런 언니를 오랫동안 볼 수 없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죽을 만큼 앓았다.     
 철이 들면서 언니가 독일에서 호강하며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가 보내온 독일 신문 일 면에는 언니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는데 나는 언니가 그곳에서 공부를 잘해 실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독일 쪽 대표와 악수를 나누게 되는 바람에 신문에 실린 것뿐이었다. 파독 기간 내내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언니는 병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파독 간호사들 중 많은 이가 귀국했지만 언니는 연장근무를 하며  좀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약기간을 연장해 집안의 경제를 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팔 남매 중 맏딸이었던 언니는 정이 많았다. 버려진 제비 새끼를 주워다가 파리를 파리채로 잡아 먹여 키울 정도였다.     
  큰언니가 떠난 지 9년 만에 처음으로 두 달간 휴가를 얻어 집에 오자 우리 가족은 울고 불며 언니를 맞이했다. 훌쩍 커버린 나를 보곤  '어머, 이게 누구야?'하며 놀라던 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선물로 사 온 앙증스러운 털모자는 한 번도 써보지 못했지만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끈 달린 밍크 털모자였는데 어찌나 작던지 상투처럼 매달려 머리통을 욱여넣을 수도 없고 정말 그림의 떡이었다. 우두망찰 털모자를 들고 너무나 미안해하는 언니에게 나는 서운해하지 않을 만큼 컸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큰언니는 내게 미안했는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당시에는 귀물이었던 파커 만년필을 보내왔다. 그리고 1990년 봄, 나의 결혼식에 언니는 비로도로 만든 예복을 리본 달린 상자에 담아 보내왔다. 22살에 독일에 간 큰언니는 69세 노인이 되었다. 그동안 고국방문은 네 번 뿐이었다.     
어느 날 TV를 통해 ‘남해 독일인 마을’을 보았다. 서독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분들이 남해에 모여 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큰언니에게 연락해 언니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언니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왔다.
 독일인과 결혼해 삼 남매 낳고 잘 살고 있는 큰언니이지만 고국에 대한 애착과 향수는 여전해 나보다 국내 사정을 더 잘 알 때가 많다. 독일에는 한국인들 대신 터키인들이 들어와 허드렛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동남아인들이 들어와 3D업종에 종사한다는데 그들에게 잘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걱정까지 한다.
 언니에게 여생은 한국에서 보내면 어떨까 하고 의사를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언니는 생물 선생이었던 형부가 평소 한국 욕은 기막히게 잘 알아들어 언어에 소질이 굉장한 줄 알았는데 아무리 한국말을 가르쳐도 욕만 잘해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외국 생활의 고충을 잘 아는 언니이기에 노년의 형부를 다 늙어 힘들게 할 수는 없으니 에둘러 그리 말하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정신과 의사인 맏딸이 동양인의 피가 흘러서인지 아직도 엄마의 뒷바라지를 바라고 있단다.     
  한국에서 살면 어떻고, 독일에서 살면 어떠랴. 가까이 살아도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멀리 살아도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귀와 눈으로 만날 수 있다. 그 옛날에는 언니를 그리워하며 꾹꾹 눌러쓴 편지가 그 먼 나라에 도착해 답장이 오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 가까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하루나 이틀이면 왕래가 가능한 지구촌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그저 정 많고, 눈물 많은 큰언니가 건강하게 나와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언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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