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 유명 백화점 식당가에 솜리라는 한식당이 있다. 불고기와 비빔밥이 맛있고 밑반찬도 정갈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음식 맛이 좋다는 것 외에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또 있다. 식당 이름 때문이다. 솜리는 익산의 옛 지명, 그곳은 내 유년의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솜리, 하고 발음을 하면 외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고향은 서울이지만 솜리가 고향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두 동생들을 돌보느라 힘이 든 엄마는 여름이면 나를 외갓집으로 보내셨다. 넓은 신작로를 끼고 있던 외갓집은 우체국 바로 아래에 있었다. 우리는 담을 같이 쓰고 있다는 이유로 우체국 전화를 우리 집 전화마냥 이용했다. 직원이 유리창을 열고 서울에서 전화 왔다고 소리치면 우리는 전화요금이 많이 나올 새라 달려가 받곤 했다. 할머니는 고정적인 수입을 위해 기역자 건물 끝의 신작로에 면한 공간을 이발소에 세를 주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러 왔다. 마당에 울려 퍼지는 재잘거리는 소리, 햇살에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행복한 느낌을 주곤 했다. 나도 가끔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렸다. 양철로 된 빈 두레박은 돌로 된 우물 벽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내려가 물에 잠기었다가 줄을 잡아당기면 따라 올라왔다. 낑낑거리고 길어 올린 물은 다 흘리고 반 통 정도 남았지만 그 어떤 탄산음료보다 시원했다.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끼 낀 검은 우물 속은 무서웠으나 공명 효과가 나는 내 노래 소리에 취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곳 촌아이들은 내가 서울에서 왔다고 나를 공주처럼 대접했다. 할아버지는 손녀딸을 위해 앞동산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주셨다. 마음속으로 완장을 찬 나는 아이들을 줄을 세워 차례로 그네를 태워주었다. 나보다 학년이 높은 아이도, 키가 큰 아이도 고분고분하게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골의 아침은 마당을 쓰는 할아버지의 비질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깨끗하게 쓸린 마당을 보면 뭔가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빗자루가 지나간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우체국 유리창 바로 아래 감나무에 닿았다. 언젠가 감을 딴다고 올라갔다가 떨어졌을 때, 막상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기겁을 하시던 기억이 난다.
외가는 비교적 큰 농사를 지었다. 머슴들에게 줄 새참을 나르는데 따라갔다가 피가 흐르는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움이라니. 그 후 나는 한동안 ‘찰거머리’라는 단어를 대단한 욕으로 사용했다. 할머니를 따라 고구마를 캐러 갔다가 요술 부리듯 줄기에 줄줄이 달려 나오던 고구마는 또 얼마나 신기했던지, 원두막에서 먹던 수박과 참외는 어쩌면 그리도 달던지. 할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때 가마솥에 기름기가 흐르는 알알이 통통한 하얀 쌀밥을 지으셨다. 내가 입맛이 없다 싶으면 밥을 지을 때 간 고등어를 중탕해서 주셨는데 그 짭조름한 비린 맛에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웠다.
언젠가 놉을 얻어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볏짚을 쌓느라 부산한데 나는 집에 가겠다고 구두를 신고 나섰다. 구두코에 리본이 달린 빨간 구두였다. 할아버지는 바쁜데 어디서 투정을 부리느냐고 혼을 내며 나를 방으로 들여보내셨다. 발버둥을 치다 그만 구두가 벗겨져 볏짚단 속으로 들어갔다. 일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한참 가리를 풀어헤치는 소동을 겪고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저녁이면 외갓집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원광대학으로 이모와 산책을 다녔다. 큰 연못도 있고 멋진 현대식 건물도 있는 그곳은 근사해 보였고, 대학생들은 불어오는 저녁 바람처럼 한들한들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멋모르고 즐거웠던 날들도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루가 길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키 큰 미루나무 꼭대기에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빠알간 샐비어가 피고, 탱자나무 울타리가 실해지면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었다는 걸 몇 해의 경험으로 알았다. 신작로에 나가 먼지를 풀풀 내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숫자를 세기도 했고, 엉켜 있는 뱀처럼 물고 물리며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발소 삼색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행위로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대장 노릇도 시들해져 소나무에 매어둔 그네 뒤로 지던 붉은 해와 보랏빛으로 물든 노을이 슬펐다. 아니 서울 식구들로부터 잊힌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못 견디게 엄마와 아빠, 동생들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 외가는 그곳을 정리하고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옮겨 나의 솜리행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곳의 한 시절은 우물처럼 깊은 곳에서 나의 정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결혼 후, 원광대학에 가기만 하면 쉽게 외갓집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숙제하듯 찾아갔지만 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신작로는 포장이 되어 있었고 우체국도, 이발소도, 할머니가 눈깔사탕을 사주시던 점방도 흔적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근처에 있는 미륵사지탑을 찾아갔지만 패망한 백제왕조의 폐사지라서였을까, 마침 찾아간 시간이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는 저녁 무렵이어서였을까, 쓸쓸했다. 나는 그곳을 잊기로 했다.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외할머니는 첫손주였던 나를 제일 예뻐하신 것 같다. 딸만 셋을 둔 할머니는 “나는 니가 잘 사는 게 보기 좋아야” 라고 내게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내가 아들을 낳자 크게 기뻐하시며 손주사위에게 그러셨다.
“색시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디.”
건강했던 할머니는 예배당 다녀오는 길에, 자동차에서 내리던 사람이 열던 차 문에 맥없이 치어 세 달여 병원에 계시다 83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본 최초의 죽음이었다. 지금도 ‘내 강아지, 내 토깽이’라고 불러주었던 할머니를 꿈속에서 만나면 기분이 좋다.
나는 시골이 고향인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다. 그들의 따뜻한 정서와 추억들이 부럽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나마 내게 고향하면 떠올릴 수 있는 솜리가 있어 나는 좋다.
에세이스트 41호 2012년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