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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초적인 그녀 <<문학사계>> 2011년 겨울 40호 게제    
글쓴이 : 임매자    12-05-21 00:38    조회 : 3,592
원초적인 그녀 
 

  “글쎄, 순아 엄마는 한글도 모른다고 하네요.”
  안면만 있을 뿐인 그녀는 느닷없이 불쑥 찾아와 속삭이듯이 말했다.
  “한글 모르면 뭐 어때요. 불편을 모르고 살면 되지요.”
  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 동네에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내가 순아 엄마와 친한 것도, 동네 토박이들과 어울려 사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내내 시큰둥한 반응에 흥미를 잃었는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문 밖까지 배웅하고 들어와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텅 빈 시선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는 순아 엄마가 꺾어다 놓은 작약이 오늘따라 더 소스라치게 붉다.
  우리 사이에 정서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늘 어떤 채울 수 없는 허기짐은 있었다. 그런데 한글도 모른다니. 너무나 가여웠다. 얼마나 갑갑했을까. 그것을 몰랐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모임의 장부를 그녀에게   맡겼으니 그것을 감추느라 얼마나 당혹했을까.
  순아 엄마는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워 남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었다. 처음 일 년 치 노임을 받아 11명의 동생에게 생활비로 주고 자신은 주인집에서 일 년 동안은 어떤 서러움을 받아도 꼼짝 못하고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나는 좋은 부모 만나서 공부를 좀 더 했다는 것 외에 우리는 다른 것이 없었다. 한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나니 그녀에 대한 감성의 회로가 더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려운 환경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았는데도 너무나 맑았다.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순수하고 곧아서 그녀를 대하노라면 한밤중에 마시는 시원한 자리끼처럼 상쾌했다. 잘난 체할 줄도 모르고 외골수라 술수를 부릴 줄도 몰라서 곧고 정직한 내면은 상아처럼 단단하고 단순하여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그녀의 남편은 젊을 때 바람이 나서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순아 엄마는 네 남매를 바르게 키워 대학을 졸업시켰고, 이제 아이들은 모두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아흔세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셨다. 결혼식이나 음식점에 가면 꼭 시어머니를 위한 음식을 따로 싸가곤 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화를 삭이지 못해 밤을 하얗게 밝히고 새벽까지 학교 운동장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창백한 고독이 투명한 여과지처럼 흡수되기 시작하면 나는 연민으로 내 오지랖이 펄렁대기 시작한다.
  상처 입은 누군가를 위로할 때 가장 나쁜 일은 그 상처를 지적하고 문제 삼는 일이다. 단순히 거기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데 말이다.
  하늘 한쪽이 푸른색으로 물들던 어느 초저녁, 그녀가 매일 화를 삭인다는 학교 운동장에서 우린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만일 자기를 못 만났으면 나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을 거야.”
  그녀는 옆얼굴을 보인 채로 무심한 척 작은 목소리로 웅얼대었으나 표정은 울듯이 일그러졌다.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파져 왔다. 가슴만 아픈 게 아니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견딜 수 없어서 그만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항상 들어주기만 해도 그녀의 감정의 파고가 스르륵 다시 잠들기에, 나는 심한 감정이입으로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펄럭대는 오지랖을 여미면서 다시 힘없이 주저앉았다.
  “해 질 녘에는 절대 이곳에 혼자 와서 헤매면 안 돼.” 하고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네에서 계가 깨져 오랫동안 부었던 돈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동안 사근사근하던 지인들이 갑자기 헐크처럼 변해 서로 손해를 안 보려고 하는 것이 흡사 전쟁터 같았다. 나는 감히 그들의 전쟁에 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전사와 같이 용감하게 논리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올려놓으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래서 손해를 안 봤지만, 그것은 처음 본 그녀의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정서와 교육의 차이를 떠나 원초적인 정으로 비비다 보니 이제 농익은 결이 보이는, 그렇게 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꾸밈이 없었고 투명해서 우리의 소통은 흡사 건강하고 싱싱한 정신의 나신 같았다.
  이 동네에 온 지 30여년이 되다 보니 모임이 많아지면서 저녁이면 우리 집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녀들은 세상살이의 억울한 응어리를 내 앞에 부려놓는다. 고만고만한 인연들이 모여 제각기 만들고 있는 이야기들, 나는 그들이 썰어놓은 여운이 그대로 남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치 내 일인 듯 내 오지랖은 늘 징징거렸다.
  어떤 때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힘겹게 호흡을 하다 보니 무거운 압박감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깥일을 하는 나에게 이불 홑청을 꿰매주는 사람, 김장을 해주는 사람 등, 그녀들은 순박한 시골 여인네들처럼 정이 많았다. 그 끈끈한 정을 무거운 외투 벗듯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늦은 나이로 글을 쓰기 시작하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는적거리며 그곳에서 고단한 습관에다 삶의 밑줄을 칠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드디어 모임들을 정리했다.
  한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 길에 나가면 모두 지인이었다. 그들을 만나면 내 시간은 또 속절없이 부서지기 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누가 올까도 두려워 초인종을 내려놓고 창으로 불빛도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은둔 생활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전화로, 초인종으로 수없이 내 주위를 맴돌았을 것이다.
  마침 집이 팔려서 30여 년 가까이 살아서 거의 고향이 되어버린 그곳을 떠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내 삶의 한편에 늘 웅크리고 있는 아련한 그리움이 되었다. 내 불면증을 타고 맴돌다가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오는 그녀.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러나 그녀가 몹시도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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