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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는 바람결 만큼 무심한 절집, 보덕사    
글쓴이 : 강희진    12-05-21 21:05    조회 : 3,585
  -  우리 문화유산 한발 더 다가가기  -
 
오가는 바람결 만큼 무심한 절집, 보덕사

 가야사지를 가다보면 마을 입구에 커다란 주차장이 있다. 산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주차장이지만 의외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형의 주차장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속내가 있다지만 각설하고, 아무튼 이 주차장 맞은편 산 속 굽고 작은 외길 끝에 보덕사가 숨어 있다. 그 흔한 일주문이나 금강, 사천왕문 하나 없이 무작정 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보덕사를 찾는 재미 중의 하나가 바로 보덕사에서 금강문을 찾는 것이다.
 보덕사를 둘러보면 참, 말이 없는 절이라는 것을 금세 느낀다. 그곳에 계신 비구니 스님들도 그렇고, 가끔 보이는 보살님들도 그렇고 참 무심(無心)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기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싫다고 내색하는 사람도 없다.  아마 그것은 절집 자체가 무심해서 그런가 보다. 참 무심한 절집이다.   
  사연이 많은 사람은 얼굴에 사연이 깃들고, 사연이 많은 터는 터에서 사연이 드러나는 법인데, 이곳은 사연이 많은데도 티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 많은 사연을 일부러 감추려 하지 도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다. 보덕사는 절집이 스님보다도 먼저 득도한 무심의 절집이다. 흥선이 아버지 남연군을 가야사 금탑 자리 명혈에 이장하고 가야사 가는 길목에 세운 절집으로 남연군 묘의 원찰로 시작한다.
 부처들의 덕에 보답한다 해서 보덕사報德寺로 이름 지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속설을 퍼트린 자 누군지는 모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남아있는 스님들의 가슴으로는 표시내기도 어려운 참 가슴 아픈 일도 보덕사는 무심히도 이를 받아들인다. 절집을 불태운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 부모의 넋을 빌고, 제사까지도 올리라는 것이라니 아무리 조선의 스님이라지만, 해도 너무한 것이 맞지만 그것도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 말없는 터에 이르러서야 무슨 말을 할까. 그렇게 풍수를 따지던 흥선은 왜 보덕사는 풍수를 따지지 않았을까. 좋은 땅에서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보덕사를 답사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올리는 문구는 최창조 선생의 ‘건곤저허1)’다. 절집을 답사하는데 왜 하필 지리학자의 문구가 떠오를까. 조선 왕실이 그랬듯이, 흥선이 그렇게 풍수에 집착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아비의 묘를 이장까지 한 풍수설이었는데 원찰의 터 잡기는 왜 건곤저허를 택했을까.
 언젠가는 그 이유로 원찰이 무너지고, 다시 절집의 기능을 되찾을 것이라는 예견이라도 했을까. 인공 난 이후 불탄 보덕사는 비구니 사찰로 선방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다. 아마 조선왕실의 허약함으로 조선이 무너질 것을 예견하고, 조선이 무너지면 이 보덕사 원찰 기능도 없어져 다시 본래의 절집으로 돌아갈 것을 예견했을까.
  어쨌든 건곤저허의 폐해인지는 모르지만 인공의 병화를 막지 못해 다시 지금의 절집을 세울 수 있었고, 지금은 몸은 비록 연약하지만 비구니 스님들이 대단한 법력으로 몸소 건곤저허의 전촉풍을 막고 계신다, 아주 무심히.
   그리고 비록 불타 없어진 가야사 것이라도 다행히 몇 점의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어 우리 같은 답사객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이곳 스님들은 그것조차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그저 여기저기 사연만이 무뚝뚝하게 서 있어 답사객 또한 말이 없다. 그래서 보덕사는 더욱 말이 없는 절집이다.
 보덕사의 본전은 극락전이다.  선원과 극락전이 서로 ㅁ자를 이루고 있다. 굳이 ㅁ자라고 표현한 것은 가람의 배치가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살림집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보덕사 곳곳에는 절집의 형식에서 벗어난 양식이 몇몇 보이는 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 선원과 극락전이다.
 참 흉내도 많이 냈다. 이 흉내가 흥선의 제안인지는 모르겠지만 건축 양식도 궁궐의 양식을 따온 것은 자랑은 아닐 터, 이익공식 건물이다. 이익공식 건물로 예산에서는 유일하다. 이곳이 극락보전이다.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 집이다. 주춧돌은 가야사에서 빼와 무너진 가야사의 상징성을 알린다.
 극락전 안에는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과 탱화, 그리고 범종이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극락전의 아미타불이다. 지불(紙佛)이다. 봉화 청량사 지불이 공민왕 대의 것이면, 그보다 앞선 연대의 지불이다. 고려 명종 1171년 -1197년 사이에 조성되었고 조선 영조 2 년 (1726년)에 중수되었다.  
 문종의 제4 왕자로 출가한 대각 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열고 선교 양 종을 통합하며 왕족으로서 그 권위가 땅을 떨치며 급기야는 불교의 문화적 난만기를 맞이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맞게 되는데 그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야사의 철불 삼존상은 불에 녹아내렸고, 겨우 목숨을 건진 지불 아미타상은 보덕사 독존불로 모셔져 있다. 한켠에 놓여 있는 범종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아 또한 가슴이 아린다. 이 범종은 1673년(현종4년) 개심사에서 주조된 종이다. 언제 이곳으로, 또 어떤 이유로 왔는지는 모르나 본래 가야사의 범종은 지금 당진의 영탑사에 가 있으니 그렇다.  
 보덕사에서 제일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은 선원이다. 이곳은 보덕사가 원찰의 기능을 충실히 해낼 수 있게 모든 것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이 절집의 창건 시주자가 흥선의 큰아들인 재면으로 되어 있고, 건물 형태도 궁중의 선원모양을 본떠 지었다.   
  선원의 누마루 대들보에는 ‘少石詩境’이라는 고종의 어필이 있다. 少石詩境이라 ! 먼 고종간인 추사가 시경의 넓이를 조선까지 넓혔다면 고종은 이곳에 또 하나의 시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소석은 이 절집에 시주자이고, 고종의 형인 재면의 호가 우석又石이고 보면 그의 아버지인 흥선이 석파石坡이니 소석少石은 아마 재면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의 형은 또 무슨 사랑의 애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보덕사에 가야사의 유물은 또 있다. 석등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사석만 방치(?)된 채 마당 한 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새로 맞춘 간주를 세워 입구에 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유심有心함이 역할을 찾긴 했지만 사연까지 감추지 못했다. 가야사가 무너지면서 간주는 땅 속에 묻혔는지 없어지고 석등만 남아 이곳으로 와 있다. 석등의 규모로 가야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석등의 남아 있는 화사석은 팔각이다. 팔각 중 사면은 사천왕을 새겨 놓았고, 사면은 화창(火窓)으로 쓰였는데 바람 불 때를 위해서 조그만 구멍을 뚫어 창문을 달았던 표시가 있다. 그 속은 바닥을 높게 한 단을 두어 등을 놓을 수 있게 했다. 
 고려 초의 석등으로 원형보다 옥개석의 크기가 크게 복원되어 원래의 균형보다 전체적인 균형은 새로 짜 넣은 부재의 균형에 맞추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부조화스럽다.  
 그리고 또 하나 삼층석탑이다. 뭐가 그리 귀했을까. 수많은 문화재를 탈취해가던 일본이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 석탑을 무리해서 가져가려 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무슨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굳이 가져가야 할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이 탑조차 말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이 탑을 보면 참 시욱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보덕사에서 이 탑이 제일 정이 간다. 이곳에서 늘 오래 머문다. 시욱지란 촌놈으로 아무리 혼을 내거나 탓을 해도 비죽비죽 웃을 뿐 말을 타지 않는 촌사람을 말하는 데  이 탑이 그렇다. 참 충청도스럽다. 아니 예산스럽다. “괜찮뉴” 로 일관하여 도무지 속내를 말 수 없는 예산스러운 소박한 탑이다.  옥개석의 흐름도 그렇고 탑신과 탑신의 균형도 그렇고 아니 전체적으로 뭔지 모르게 촌스런 탑이다. 그러나 그 촌스러움을 굳이 감추려 들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그래, 나 촌놈이다’ 라고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게 더 당당하다.  혹시 일본놈들이 충청도를 전부 번쩍 들고 가려 했나 ?
  도저히 사찰의 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선 초에 지역의 유력 향도들이 모여 불성을 받기 위해 조성한 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나 문화재 소개에 의하면 가야사의 고려 탑이라고 한다. 그런데 명칭은 ‘예산 삼층 석탑’이다. 문화재 소개는 고려 탑으로 가야사 소재였다고는 하였지만 ‘가야사 삼층석탑’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가야사의 탑은 이미 소개한 금탑과 현재 영탑사에 있는 전형적인 고려 9 층 석탑이 있으니 또 다른 탑의 용도를 설명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법희선사의 부도탑이다. 법희 선사는 비구니 스님으로 평생 일로서 득도를 하신 분이다. 평생 호미를 손에 놓지 않고 사신분이다. 손수 무슨 일이든 정진하면 득도할 수 있음을 보인 분이다.

 
건곤저허(乾坤低虛)는 풍수 용어로 건방과 곤방, 즉 북서방과 남서방이 매우 허약하고 비어있어 그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전촉풍 등의 폐해를 입는다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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