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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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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돌이동에서 만난 노인    
글쓴이 : 김혜자    12-05-27 10:00    조회 : 3,746
 
   다리를 건넜다. 물돌이동에 둘러싸여 갇힌 듯이 자리를 틀고 들어앉은 수도리의 유일한 통로, 수도교다. 방금 소세한 듯 정돈되고 다소곳한 동네가 눈앞에 나타났다. 갓 푸새하여 얌전히 손질한 모시옷 차림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깔밋한 동네로 들어섰다. 그러자 별안간에 새벽 같은 정적이 엄습해오더니 나는 그만 세상과 단절되고 말았다.
   낙엽 한 번 실컷 밟아보자고, 물기 스러지며 더욱 황홀하게 불타오르는 마지막 단풍놀음차 부석사를 찾은 길이었다. 돌아올 땐 한적한 수도리, 물돌이동을 들르자 했었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내성천에 놓였다는 외나무다리도 건너보고 싶었다. 기껏해야 무릎 언저리까지 밖에 차지 않는다니까 11월의 한이라도 서린 듯 시린 냇물에 발목까지만 적셔보자고. 견딜만하면 종아리 걷어붙이고 철벅거리다가 내친 김에 그 내 한 번 건너보리라 했었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무섬마을이라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반도형상으로 돌출한 그곳은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 회룡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물돌이동 중의 하나다.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의 양성 마을이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글씨 ‘해우당(海遇堂)’ 편액을 사랑채에 의젓하게 달고 있던 고즈넉한 선성김씨 고택의 홈을 파 못질 없이 끼워 맞춘 우물마루는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마을전체가 조선 후기 전형적인 사대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세인의 눈길을 끌만한데도 의외로 그대로 옛 모습이어서 내심 흡족했었다. 주류는 물론 매점, 식당 등 상행위를 허가 없이 할 수 없다는 자율 향약(鄕約)이 잘 지켜진 것이 고맙기도 하다.
   늦가을 오후햇살에 긴 그림자를 연출하는 샛길을 따라 노란 볏짚으로 머리를 새단장한 까치구멍집에 들어섰다. 연기와 그을음에 얼마나 절었는지 부엌 아궁이에서부터 기둥과 천장까지 새까맣다. 살며시 찍어보아도 사뭇 검댕이 묻어날 것 같았다. 모든 취사와 난방을 집안에서 하도록 되어 있는 그 특이한 □자 겹집은 출입문이 하나인데 창문마저도 없었다. 연기를 빼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찌 배출했을까.
   집안에 가득 찬 연기를 내보내고 빛을 들이되 빗물은 들지 않도록 형태나 각도 등을 매우 세심하게 배려해서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에 만든 구멍이 까치구멍이다. 안내판에는 ‘까치구멍집이란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이나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의 서민주택으로 지붕마루 양단의 하부에 만든 까치구멍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 되어있다.
   동네를 돌다 정갈한 집 한 채를 발견했다. 한참을 기웃거리다 그냥 실례를 범하기로 했다. 당연히 주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터이지만 기척이 없으니 어쩌랴. 금방 비질한 흔적이 있는 마당 한편에는 디딜방아까지 자리 잡고 있어 정감이 가고 반가웠다.
   방아공이는 확 속에 박혀있었다. Y자 모양 다리가 받침목에서 벗어나 한쪽 옆으로 비꾸러져 있다. 한동안 사용치 않았지 싶은 양다리디딜방아였다. 마침 마을갔다온 주인할머니께 구경을 청하니 선뜻 안채로 앞장을 선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의 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조촐한 옛집을 볼 수 있다는 기대와는 달리 안마당을 들어서며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온통 시멘트가 발라져 흙 한 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신식으로 산뜻하게 꾸며진 목욕탕과 보일러실을 보며 굳이 그곳이 좋다는 노인을 위한 자녀들의 배려가 느껴졌다. 수시로 내려와 너무 크다싶었던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니 살기 편타는 노인도 문명의 혜택을 당연히 누려야 마땅하고말고. 어설프게 전통을 강조하며 중요시하는 얄팍한 내 이기심의 눈요깃감이 되어 달라고 섣불리 불편함을 고수하랄 수는 없고말고. 암.
   76세 주인할머니는 선성김씨란다. 세 번을 여쭈어도 계속 선성김씨란 말뿐이던 그녀에겐 이름을 밝히는 게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그러면서도 멀찌감치 사이를 두고 우릴 따라오더니 동네 제방 밖 내성천 외나무다리 앞에서 가까이 다가왔다.
“갑술년(1934년) 큰물에 동네 안까지 물이 들어왔어. 그 후에 제방을 쌓았지. 매해 집집마다 상판 한 개와 다릿발 두 개씩을 추렴해 새로 만드는 다리야.”
한 번 말문이 열리자 옛 기억을 곱씹는 할머니의 봇물 터진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예전엔 지금 다리 넓이의 반쯤 되는 좁은 다리였어. 그래도 잘도 건너다니며 농사짓고 살았지. 동네 안에는 논밭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새색시가 탄 가마가 건너오고, 상여가 실려 나갔지. 지금은 이리 넓어도 이젠 어지러워서 건너다니지 못해.”
   지금은 넓어졌다는 외나무다리는 고작해야 20cm 남짓하다. 다리에 올라서니 냇바닥의 모래가 빤히 보이도록 얕고 투명하다. 여울지는 물결마다 햇살이 부서졌다. 재빠르게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보았다. 그런데 왜 그리 어지러울까. 평균대를 걷듯 아슬아슬한 다리를 끝까지 건너갔다간 다시 돌아올 게 왈칵 겁이나 중간쯤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자식들 다 내보내고 혼자 사는 게 편타고 당당하던 그녀는 그적도 모래밭을 서성이고 있었다.
 
   막바지 불타는 단풍을 배경으로 은행나무 노란 양산을 쓴 그녀가 황금빛 카펫 위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곧 미련 없는 가을은 떠나가고 서두르며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해야만 할 때다. 인생의 늦가을 같은 노인이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답사를 나설 때면 어렵사리 종갓집을 지키는 연세 든 종부께 드릴 사탕을 준비해 다니곤 하는데 그걸 마련치 못한 손이 부끄럽고 섭섭해 설까. 그저 그녀를 마주보며 손을 흔들었다.
                                                                                                       《월간문학》2009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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