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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와 양은 주전자    
글쓴이 : 조정숙    12-05-31 09:39    조회 : 3,904
막걸리와 노란 양은 주전자
 
조 정 숙
 
해마다 여름이면 내 고향 동구 밖 너른 들판에는 하얀 토끼풀 꽃이 지천으로 피어 난다.
사랑방에 손님이라도 드시는 날이면 엄마는 내 손에 한 되들이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려 주시며 막걸리를 받아 오라고 하셨다. 수시로 드나드는 할아버지 손님들로 자주 술상을 보아야 했기에 부엌 찬장 옆에 매달린 주전자는 물기 마를 새가 없었다. 위로 언니 들이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벌벌거리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심부름은 언제나 내 차지가 되었다. 막걸리 값을 쥐어주며 다녀오라고 하면 신이 났겠지만 그 날도 영락없이 외상이었다.
 
양조장 집에는 내 또래의 머슴애가 있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 앞에 서 있다가 그 애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쥐구멍에 쳐 박히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게다가 자기 엄마 옆에서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애가 듣는데 “외상 이래요.” 라고 말하기는 정말 싫었다. 망설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외상을 달아놓고 양조장을 나섰다.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잔뜩 속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죄 없는 달맞이꽃만 뚝뚝 목이 달아났다. 졸고 있던 꽃잎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가 지나온 자욱 위에 널부러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몇 개의 다랑논을 지나 둑방에 올라서면 토끼풀 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꽃을 엮어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고 하다 보니 좀 전의 속상했던 마음은 어느새 눈 녹듯 사그라졌다.
 
사각거리는 벼 포기 사이로 난 논두렁길에는 빨간 뱀딸기가 수줍은 듯 잎새 뒤에서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밑에 숨어 있다 내 발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풍덩 논배미로 뛰어들면 그 소리에 나는 더 소스라치게 놀라 뭉개져 내리는 논두렁도 아랑곳 않고 집으로 내 달렸다. 그러는 사이 양은 주전자는 울컥거리며 막걸리를 토해냈다.
줄어든 막걸리가 걱정이 돼서 뚜껑을 여니 뽀얀 살빛의 시큼한 냄새가 내 코를 유혹했다. ‘딱 한모금만 먹어봐야지’ 생각하며 주전자 코에 입을 대고 꿀꺽 들이키자 시큼 달콤한 막걸리가 목 줄기를 타고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흘러들었다.
 
들판에 앉아 딴 짓 하느라 시간도 많이 지체 됐고 주전자 어깨까지 줄어든 막걸리가 맘에 걸려 발걸음은 돌을 매단 듯 무겁기만 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다시 목이 말라왔고 아까 그 시원한 막걸리 맛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지막이라 다짐하길 다시 또 몇 번, 그러는 사이 좁다란 논두렁은 점점 아득해져갔고 끝없이 펼쳐져 있던 파란 하늘은 내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와 울렁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물고를 보러 나온 옆집 아저씨가 흙투성이가 돼 들판에 누워 자고 있는 나를 들쳐 업고 빈 주전자를 들고 오신 거였다.
그날 저녁,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이리저리 논두렁에 쳐박혀 흙 범벅이 된 나를 깨끗이 씻겨 주었다. 소란을 떠느라 늦어진 저녁상에서 할아버지는 반주로 드시던 막걸리 한 모금을 남겨 내게 주셨다. 하지만 낮에 느꼈던 그 시원하고 달콤했던 맛은 어디로 가고 역한 냄새에 속이 메슥거렸다. 할아버지가 콩나물국에 말아 주신 밥으로 속을 달래고 아버지가 타주신 설탕물도 보너스로 받아먹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동네에서 뉘 집 몇째 딸이 아니고 술 먹고 들판에 누워 자던 애로 불려졌다.
식구들은 심심할 때면 그 얘기를 꺼내 “이제 시집가기는 글렀다.”며 어린 내 가슴에 시퍼런 멍을 들이곤 했다.
나는 정말로 시집을 못 가게 될까봐 얼마나 오랜 날을 가슴앓이를 했던지.
 
여전히 여름이 오고 공원 울타리 옆에도 하얀 토끼 풀꽃이 피어났다.
그 아린 경험 때문인지 알코올에는 꽤 강력한 면역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세월이란 항생제를 날름날름 받아먹은 덕분에 웬만한 상처에도 끄떡 않는 배짱도 가지게 되었다. 오월의 연둣빛처럼 여리던 마음은 점차 팔월 태양아래 짙은 녹음처럼 탁한 빛을 띠어 가고 있다.
 
다시 올 수 없는 어린 날의 추억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다란 그리움을 지어내며 가끔씩 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 내곤 한다.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인자했던 할아버지와 찌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 그리고 토끼풀 꽃이 융단처럼 깔려 있던 고향 들녘이 햇살이 아름다운 날에는 서럽도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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