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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당호, 물위의 길을 걷다. 1    
글쓴이 : 강희진    12-06-05 15:10    조회 : 3,662
우리 문화유산 한 발 더 다가가기 -예산-
 
예당호, 물위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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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심하면 예당호도 마른다. 예당이 마르면 농심도 마른다. 그러나 예당에는 옛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대흥 사람들의 기억도 옛길 따라 흐른다. 효제비가 있던 가방교의 흔적도 보이고, 신양으로 건너가던 삼거리도 보인다.
따뜻한 기운이 오면 언 예당호의 어름이 이 옛길 따라 먼저 녹기 시작한다. 아직은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음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사람들이 살고, 길이 끝나는 곳마다 곡식을 붙이던 숨소리가 들리고, 길이 끝나는 곳마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사실과 설화 사이에 서 있던 비인비신의 노씨 부인 사당
 
물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농경 사회가 주를 이뤘을 때는 물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하늘에 제를 지내고, 물을 얻지 못하는 왕은 권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물이 생명이었다. 따라서 누군가 물을 준다면 그가 곧 생명을 주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이가 곧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물을 준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려 한다.
예당, 참 넓다. 한국 제일의 호수이다. 중국에 서호가 있다지만 예당호에 이를까. 저수 면적이 100만 평에 이르고, 하이킹하기 좋은 아름답고 멋진 둘레 길이 80리가 넘는다. 1962년 완공된 이래 예산과 당진 지역의 농업의 젖줄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 예당호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다고 얘기하면 내방 객들은 모두 놀란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자 !
지금이야 예당 호가 그 크기와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조선 중기에는 많은 보와 제언(堤堰)을 두고 벼농사를 짓는 농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고 예산지역의 수리시설도 따라서 발달하였다. 당시의 예산 현의 보의 현황은 장승포를 위시한 28개의 보와 제언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오가면 원철리를 비롯한 오가 들판에 물을 대는 보는 국사당 보였다. 이 국사당 보는 오가 땅에는 매우 중요한 보다. 이 국사당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예당은 바로 이 국사당 보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보가 만들어진 때는 정조 때다. 당시 현감 한경의 오산문첩에 의하면 예산 지역은 가뭄이 심한데다가 냇가가 들보다 한참 아래에 있어 물 대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현감은 현감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물을 찾고, 물을 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주로 보를 파고, 제언을 만들어 물을 대었다. 그러다 보니 물 부족으로 자연 물싸움이 일어났고, 이 물싸움은 개인끼리의 싸움도 있었지만 현과 현 사이의 물싸움으로 비화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물싸움이 둘이 있는데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다. 우선 광장제언 싸움이었다. 광장제는 지금의 삽교 성리 부근에 있던 제언이었다. 이 광장제는 장승포제언과는 반대로 덕산 현에서 막은 제언이었고, 그 이득은 덕산 현 농민이 보았으되 손해는 예산 현 농민들이 보고 있어 소를 제기한 싸움이었다. 드디어 1760년 한경이 예산 현감으로 오면서 물에 대한 갈등과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싸움은 3년여 동안 지속되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비록 소에서는 예산 현이 이겨 제언을 헐 것을 명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현감들이 교체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이는 당시 예산 현이 덕산 현에 비해서 상당히 약한 현세를 가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또 다른 물싸움은 바로 장승포제언 싸움이었다. 이 장승포제언 싸움은 예산 현 농민과 대흥 현 농민과의 싸움이었다. 장승포 제언은 예산 오가 지역 농민들이 만든 제언이었다. 그러나 제언을 막으면 그로 인해 물이 고인 땅은 대흥 현의 땅이다. 그러나 그 이익을 보는 쪽은 예산 현 농민이기 때문에 갈등이 심했다. 이 싸움은 일방적으로 대흥의 승리로 끝났다.
이 장승포제는 제언사堤堰司에서 폐기 처분하도록 명하였다. ‘장승포제언은 대흥군의 양안에 들어가 있는 땅이므로 병인년인 1686에 대흥 백성들이 소로 인하여 해당 관서인 제언사에서 이를 헐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런 물싸움에서 져 장승포제언을 헐게 된 오가 지역 농민들이었다. 장승포제언이 헐리자 오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전답에는 물이 절실했다. 따라서 이후 물길을 찾는 데 매우 고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正祖) 2(1794) 예산 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더욱이 오가 땅은 냇가가 땅보다 너무 낮아 물을 댈 엄두도 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오가면 오촌리 광산 김씨 댁으로 시집온 노씨 부인이었다.
조선 시대 보를 막는 것은 국법으로 정했다. 왜냐하면 보는 경작지를 훼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리 사람들이 모여서 보만들 것을 현감에게 요구했다. 그런데 보를 만들고 수로를 만들려면 농지를 훼손해야 한다. 그러려면 농지 주인들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국가로부터 허가가 있어야 했다. 누구의 농지를 통과해야 하는지도 꽤 문제였다. 더군다나 어느 땅에 물이 있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아무도 나서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때 부인이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뾰족한 묘안이 없었다. 누구의 땅을 양보하라고 하기에도 자신이 없었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하나로 모아지기는커녕 더욱 인심만 사나워지고 있었다.
그런 데 어느 날 그녀는 꿈을 꾸게 되는 데, 꿈속에서 신령이 나타나더니 이런 계시를 하였다.
내가 들의 신령인데 내일 눈을 내릴 터이니 그 눈을 따라 수로를 내거라. 그러면 집안은 물론 마을이 흥할 것이다 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나 오뉴월에 눈이 왔을 리 없었지만, 꿈이 하도 상서로워 밖을 내다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논 가운데로 흰 눈이 내린 것이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이 길을 제안했다. 물론 그동안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신령님의 계시라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의를 거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 눈이 내린 길을 따라 수로를 냈다. 마침 수로를 내기 시작해 10리가 넘는 곳인 지금의 예당저수지 수문 부근인 가따무니의 구지봉인 딴산에 이르러 물을 찾아 보를 막았다. 이것이 예당의 시작이다
이 노씨 부인은 꽤 슬기롭고 지혜로웠던 것 같다. 아무도 물이 있을 것이라는 장담을 못한 상황에서 누구의 길을 통과할지에 대해 논의가 지루하게 이뤄질 때, 물론 신의 힘을 약간 빌리기는 했지만 결단을 내리고 이 길을 제안한 것이다.
사실 그 눈길은 된서리였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했던지 그날따라 된서리가 강하게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도 그 부분만은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녀는 서리가 녹지 않은 땅을 선택한 것이다. 서리가 녹지 않은 것은 바로 땅속에 물기가 있어 찬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이 보 때문에 매년 풍년이 들었고, 노씨 부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보 부근야산 하록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의 가따무니 동네로 수문 좌측의 작은 야산 부근이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추모에서 기원으로 바뀌면서 신격화에 이르며 비인비신의 성황신이 된다.
사당은 60년대 말까지 존속됐고 왔고, 새마을 사업과 미신타파의 사회 개혁이라는 미명에 밀려 어느덧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당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사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 노씨 부인으로 여겨지는 한복을 입은 여인상이 있었다고 한다.
설화 뒷얘기로 전해지는 것이 국사봉이다.
이 노씨 부인이 만든 보를 사용하기를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분규가 일었다. 처음에는 논에 물을 대어 농사짓는데 만족했지만 농사가 안정되자 토지에 대한 분규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대흥현과의 분규 또한 빈번하였다. 대흥 현과 예산 현 농민들 간의 보싸움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제언에서 좀 더 큰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보를 축조하려는 데 대흥 현 주민들이 반발한 것이다. 이 분규를 대처하는 것에 현감이 소홀하고, 급기야는 암행어사가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암행어사는 후에 대한민국 최초의 전보국총판서를 역임한 홍철주다.
암행어사 홍철주는 농민들을 설득하고, 대흥 현을 설득하여 제언을 막게 하는데, 이때 이 제언을 막을 흙이 부족하자 나라에서 땅을 내주었다. 이 땅을 국가에서 내려준 땅이라 하여 국사봉(國賜峰)이라 하고, 보 이름을 나라에서 준 땅을 의미하는 국사(國賜)와 노씨부인의 사당을 의하는 당()을 합하여 국사당보라 했다. 그 국사봉은 지금 예당 수문의 우측 산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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