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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문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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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못할 불상사    
글쓴이 : 문영휘    12-07-14 12:06    조회 : 3,833
  잊지 못할 불상사
                                            
                                                           문  영  휘
  1960년대는 우리나라 농촌인구 비율이 오늘의 6.4%의 약 9배인 57%정도로써 가난한 농민
을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두고 일할 때였다. 지금처럼 20-50클럽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상상
도 못하고 잘 살아보겠다고 영농에 머리를 싸잡아 메고, 복된 농촌을 만들고자 공을 들일
시기였다. 지도 대상 중 하나는 청소년 소녀 4-H구락부였다. 이는 1947년 경기도 지사 구자
옥 씨와 군정관인 앤더슨 중령 중심으로 미국에서 도입한 농촌 청소년운동 조직으로써 그후
도시 학교중심의 보이스카우트(Boy scout) 운동과는 다른 대형 조직체였다. 이들에게 깨우
쳐줄 다양한 교육, 훈련, 행사지도 중 하나가 야외교육 훈련과 경진대회이다. 대통령 우승기
까지 두고 이들 영농후계자 양성을 위해 각 도별로 선의의 경쟁을 시켰다. 그때 나는 도 농
촌진흥원에서 이 일을 맡아 다른 도에 뒤지지 않겠다고 지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70년 포항 해변에서 4H구락부 야영훈련을 하고 있었던 일이다.
  햇빛이 쏟아지는 한여름 7월28일부터 31일까지 3박4일간 찌는 더위 속에서 푸른 산 속 개
울이 있는 곳이나 강변 넓은 곳에서 하던 행사를 그 해에는 해변으로 정하고 도내 시 군별
연합회 대표 남녀회장 부회장과 자원지도자 모두 120여명을 인솔하여 포항 앞 바다 모래사
장 위에 여장을 풀었다. 시골 청소년 소녀와 지도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눈부신 모래사장 위
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끝까지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고 환호를 하며 두 팔을 쭉 뻗고
소리소리 지른 후에 야외교육(캠프)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곧 땀이 흘러 비를 맞은 것 같이
옷이 흠뻑 젖어도 젖는 줄 모르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교육이 시작되었
다.
  “나는 나의 구락부와 사회와 우리 나라를 위하여 .......”라고 서약을 하고 일정에 따라
행사가 계속되었다. 총책을 지고있는 나에게는 행사 및 생활지도와 참석자의 취사(炊事)를
전담한 여직원 포함 6명에다 도 연합회 자원지도자 10여명이 도와주고 있었지만 잠시도 마
음놓을 수가 없었다. 행사도 중요했지만 그네들 부모로부터 귀한 자녀들의 건강과 생활 책
임을 맡은 데다 남녀간의 불상사, 해변가 불량배의 침입 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사 진행상황을 챙기며 강사 안내와 내방객 응접까지 대비하며 안정 교
육을 위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수비를 세우고 일일이 뒷바라지하느라고 행사를 마칠 때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 밤 캠프파이어(봉화식) 시간이었다. 밤 10시 민주시민으로써 성실한 일꾼
이 되어 귀향 후 단위 구락부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결속을 다짐하는 시간
이었다. 태극기와 4-H기를 세우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서 전 회원을 향하여 대표 여
부원이 주문을 소리 높여 웅변을 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팔을 들어올리다 갑자기 선 자세에
서 그대로 넘어진 체 말문이 막혔다. 놀란 나는 보건소에 연락을 하게 했다. 그리고 당해군
지도자를 불러 잠자리인 텐트로 옮겨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향 지도자가 다가가
자 처음 말문을 열어 자원 지도자가 아닌 나‘문 선생’을 꿈속 말로 찾는다고 했다.
                                       
  정신없이 행사를 진행 중이었지만 망설이다 말고 하던 일을 제치고 나는 달려가서 덥석
부둥켜안고는 여선생 막사로 들어가서 안정을 시키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때
바로 보건소 의사가 와서 검진을 하고 링겔 주사를 주고는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것이라고 하
기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원인은 신경과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 계획에 따라 추진하라
고 했던 캠프파이어 현장에서는 한두 사람씩 더하여 배를 움켜쥐고 배알이에다 한기(寒氣)
까지 들어서 배겨낼 수가 없다며 막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호령을 하며 질서를 잡으려 했
지만 동료직원과 자원지도자 들은 현장에 있는 사람만으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결국 남은 부원으로 마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혼돈상태였다. 120명 중 2/3 가까운
70여명이 텐트 안에 드러누워서 뒹구는 것이었다. 꼭 전쟁터의 야전병원 같았다.
 
  모두에게 링겔 주사를 추가로 반입하여 맞히던 의사가 물었다. 식중독인 것 같은데 오늘
점심을 무얼 먹였느냐고 물었을 때 옆에 있던 취사담당 K계장은 애들이 좋아하는 짜장면이
라고 했다. 그 짜장면에 돼지고기를 많이 넣었다고 했을 때 의사는 바로 그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고 하였으나, 나는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노출이 될까 두려웠다. 신문기자와 정보기
관들에 대한 걱정이 더하였다. 관리부실 이란 책임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지도자와
부원들에게 입 단속을 하고 외인출입을 금지시키고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이 일은 포항
지구 해병대 사령부와 사전 문서협의를 거쳐 수륙양용 쇠덩이 전차를 6대에 나누어 태우고
바다를 항해하는 체험을 하기 위해 진행된 일이었다. 해병 대원들도 농촌출신이라 부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부풀어 오른 이들의 즐거운 환호의 요청을 거역하지 못하고 깊숙
이 멀리까지 가서 한시간 이상 지연 회항에서 배가 고픈 젊은이에게 준 점심이 잘못된 탓이
었다.
새벽 5-6시 전후에야 다시 한 두 명씩 툴툴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나의 기뻤던 감
정을 무엇에 비기랴. 결국 4-5명은 병원으로 옮겼으나 제때에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날 훈련
을 마치고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네들은 겨우 웃으며 일어나서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했
다. 우리는 회복이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
다. 귀향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까지 하였으나 그 일이 나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
한 잊지 못할 불상사로 남아있다. 요즈음도 잔치 집이나 학교 등 단체생활에서 여름철 집단
식중독으로 법석을 떠는 것을 보면 마음이 움찔해진다. 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식생활 부주의에서 일어난 것으로써 선진국이나 후진국 어디에서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
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이듬해에 중앙경진대회 출전준비 교육을 할 때 일이다.
  많은 부원들이 한 해 동안 이수한 과제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교육행사인 중앙경진 
대회에서 전국 13개 시 도 중 매년 7-8등으로 입상권내에 들어 가보지 못한 우리 경북도는
원망이 아닌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신세가 되어 의욕마저 꺽였다. 그러나 나는 새롭게 이 일
을 맡은 터라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현지 기술지원 지도로 시 군 단위에서 선발된 우수부
원과 임원, 지도자, 대학4-H연구회원 모두 82명에게 실제 과제이수 과정과 과학적인 심사,
감정 등의 기술교육 경기에다 웅변, 연시 등 현장경진까지 우승을 위한 마지막 종합정리 교
육을 농도원 지도자 수련원에서 5일 계획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추위가 채 가기 전인 3월
초였다. 매일 아침 조회와 저녁 취침 전 점검사열을 하였다.
 
  하루는 아침 조회 때 임원 6명이 나오지 못하고 있어 돌아보니 일부 지도자는 귀속 말로
들려준 이야기는 2층에서 그 들이 의식을 잃고 일어날수가 없다 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자치활동 회장에게 아침 조회점검을 하게 하고 뛰어 올라가 보았을 때 의외의 큰 사고였다
여섯 사람이 난로 가에서 세 사람씩 머리를 마주하고 누워 입에서 거품을 흘리고 눈의 초점
을 잃은 채 말문이 막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죽음 직전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대기차량과
지나가는 택시를 모두 불러들이고 환자를 태워서 병원으로 옮기게 하고 행사를 진행하려했
으나 믿었던 지도자들도 뒤로 물러서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뒤 책임문제 때문이었다. 무얼
꾸물거리느냐 원망을 하며 나부터 한 사람 등에 업고 내려가기 시작하니 그때서야 모두가
따라 서둘러 한 사람씩 업고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약물치료를 하며 안정을 시켰으나 병원
의사의 말은 가스에 취한 것이라고 하며 그나마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
험할 뻔했다며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부원들이 잠든 후 대표임원 자기네끼리 내일 일을 위한 이야기
를 나누다 연탄난로 뚜껑을 열어 놓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꿈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하직을 하고 하늘나라로 갈번 했던 불상사였다. 그 지도사업은 젊은 청소년들의 마
음의 문을 열고 오늘날 농민들의 의식 변화, 농촌 생활공동체의 변화, 지역발전변화에 영향
을 주고 낙후된 허물을 벗기는데 도움을 주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도시 대비 우리농촌의 후
진성은 선 후진국을 막론하고 일깨워야할 지도자의 과제라고 여겨진다.
  한편 현지경진과 현장경진을 종합 평가한 결과는 아쉽게도 3위였으나 이듬해에는 1등이
되어 우승기를 차지해 부강(富强) 웅도의 위상회복에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끔직
한 불상사는 기억에도 되살리기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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