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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공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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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    
글쓴이 : 공인영    12-07-16 14:32    조회 : 4,496

 
 외출
 
 

                                                                 
  조급한 걸음으로 계단의 중간쯤을 내려오는데 이런, 전철은 이미 한 걸음을 떼고 있었다. 저걸 꼭 타야 하는데. 그러나 육중한 괴물은 이런 안타까움을 즐기려는 듯 콧방귀까지 뀌며 한발 앞서 달아나 버린다.
  지각이다. 처음부터 다소 무리한 배움터를 정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집을 나서는 내 꽁지에 쓸데없는 미련이 달려 일찍 일어나고도 차 시간에 허겁지겁할 때가 많다. 약속을 어기거나 지각하는 일들을 못 견디는 편인데. 슬슬 삶을 핑계 삼아 느슨해진다.
  허공에 떠 있던 바람까지 몽땅 빨려간 탓일까. 전철이 떠난 쪽으로 쏠린 듯 휘어진 긴 역사 안이 잠깐 동안 적막하다. 빈 공간을 품어선지 내딛는 발걸음 소리에 에코가 묻어난다. 똑 똑 또옥.
 이럴 때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자판커피 맛은 형편없다고 누가 그랬더라. 위생 상태로야 허다하게 인정하지만 그러나 간혹 드물게는, 좋은 카페에 간 것처럼 괜찮은 맛과 만날 때가 있다. 아마 기계를 관리하는 주인의 개인적인 취향 덕분이지 싶다. 커피와 프림과 설탕의 비율이 맛있는 삼박자가 되는 게 아무렇게나 조작해 놓고 가는 인심에서야 나올 리가 있나.
  아, 쌉사름하고 너무 달지 않은 맛이 맘에 든다. 간혹 쓸쓸한 기분이 드는 날엔 또 달짝지근한 커피가 마시고도 싶고, 그러니 문제는 사람이구나. 취향이 변덕 부리는 걸 누가 맞추랴. 한 모금 넘기며 목구멍으로부터 따뜻하게 번지는 이 기운이, 마주치는 누구에게라도 미소 짓고 싶게 한다.
  표지판에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빨간 불이 켜지니 커피를 마시는 마음이 바빠진다. 그냥 버릴까 생각하지만 내게서 무얼 버리는 행위는 늘 자신 없다. 싫어도 지니고 가는 게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천천히 음미하고 싶던 맛은 다음으로 미루고 그저 한 모금만 더.
  전철이 들어올 통로 쪽엔 벌써 전조의 불빛이 번져온다. 남은 한 모금마저 입에 털고 쓰레기통을 찾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아침 환해진 기분에 종이컵을 심심하게 버릴 수야 있나. 슛 하고 던지니 톡 하고 골인이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행위의 만족감, 별미다.
  전철은 덜커덩 덜커덩 굼뜬 척하지만 풍경에 줄무늬가 생길 만큼이나 빠르게 달린다. 휘돌아 가는 자리에선 날카로운 금속성이 가슴 벽을 긁어댄다. 아. 시큰해. 이러다가 철로를 이탈하진 않을까 잠깐 걱정되지만, 그보다는 흔들림과 속도감이 어우러져 모처럼의 외출을 활기차게 해 준다. 슬그머니 에너지 창고가 열린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산의 골격들이 자세하다. 그걸 바라보는 감정의 결들이 밥 먹고 난 뒤 양치질한 것처럼 개운하다. 호두의 갈피마다 낀 살점들을 모두 긁어낸 기분이다. 겨울 산이라고 해도 오늘은 추워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철 이른 연두와 노랑의 은근한 기운들이 앙상함만 가득했던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뿌옇게 차올라 있다. 저게 무얼까. 봄은 아직 멀었는데. 겨울철에도 살아있는 저 매섭지 않고 따뜻해 보이는 온기들이 도대체 무얼까. 창문에 코를 박고 가기 일쑤인 내게 오늘은 산의 굴곡만 멋지게 다가오는 게 아니다.
 늘 똑같은 집들과 상점 간판의 글자들도 재미있다. 게다가 빈 병과 녹슨 철근들 그리고 찢기고 상처 난 소파처럼 버려지고 수집된 폐품들이 각기 무더기를 이룬 고물상 안의 어수선함마저도 오늘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소품과 무대장치 같다.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무언가 나를 건드린 게 분명하다. 대체 어떤 환상의 비율로 섞인 걸까.
  다리 밑으론 조용한 겨울 개천이 하얗게 펼쳐진다. 얼어버린 군데군데를 다독이며 바싹 마른 계절 속에 끊겼다가 또 어느 자리에서 다시 이어져 흐르는 물이 참 맑기도 하다. 그 투명한 물 위에 펼쳐지는 야릇한 무늬. 바람이 툭 건드리면 물결은 당연히 파장을 일으키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특정한 곳에만 눈웃음 같은 잔주름이 접힌다. 다른 곳은 유리알처럼 고요하다. 그 둘의 은근한 속삭임이 사랑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곁에 오리 두 마리 마치 시샘하듯 더 예쁘고 놀고 있으니 아하, 그 또한 세한을 즐기는 진정한 풍류로다.
  기차가 다시 어둠의 터널 속으로 들어서고야 창문에서 얼굴을 뗀다. 전철 안 유리문에 지문처럼 존재의 자국이 묻어난다. 입김에 섞여 한낱 얼룩으로 증명한다. 세상 속에 비친 내 모습과 무엇이 크게 다르랴. 고로 나는 무엇인가.
 
        
                                                                                                           <06. 에세이스트 7/8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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