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회(巨志會)’라는 모임이 있다. 구걸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큰 뜻을 품고 세상으로 나가자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1980년대 초에 처음 만났으니 30년이 넘는다. 지금도 일곱 명이 석 달에 한번 씩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신세타령도 한다. 한 때는 사업도 하고, 교장에 교육장, 공무원, 언론사 간부 등 전문 직종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대부분 퇴임하고 백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 중에 C씨가 있다. 퇴임하고 한동안은 다른 일거리를 찾겠다며 자격증 공부도 하고 세일즈맨 생활도 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다. 젊었을 때 벌어 놓은 돈에 매달 2백여만 원씩 받는 연금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주 한잔 정도는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아들, 딸도 다 출가하여 잘 살고 있고, 이제는 마음 편히 아내와 함께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는 게 별 재미가 없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불만이 많다. 늦잠이 많은 아내는 아침밥도 차려주지 않는다. 배고프면 챙겨 먹으라고 한다. 평생을 밥상차려 바쳤으니 이제라도 아내 생각 좀 해달라는 것이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차려먹든가 나가서 해장국 한그릇 사먹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아내와 방도 따로 쓴다고 한다. 그는 초저녁잠이 많아 10시가 넘으면 잠자리에 들지만 아내는 TV에서 애국가가 나와야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니 따로 잘 수밖에 없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그는 새벽 5시이면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눈 뜨자마자 신문부터 챙긴다. 그리고 1면에서부터 끝까지, TV프로그램 편성표까지 샅샅이 뒤지고 난 다음에 런닝머신에 오른다. 최근에 건강사업에 관심이 많아졌다. 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가 건강검진을 받고 난 뒤로는 시간 나는 대로 운동을 한다. 이른 시간이지만 거의 매일 30~40분씩 런닝머신에 매달린다.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하면 운동을 그만두고 TV채널을 돌린다. 요즘은 케이블방송이 있어서 아무 때나 TV를 켜도 볼거리가 많다. 가끔 눈요기하는 프로그램도 만난다.
10시가 넘어 아내가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잔소리가 시작된다. TV소리가 너무 크다느니, 전기요금 많이 나오는데 밖에서 운동할 것이지 왜 런닝머신 돌리면서 운동하느냐는 등 한번 열린 입은 닫힐 줄을 모른다. 참다못해 쫓기듯이 밖으로 나간다. 딱히 갈만한 곳도 없다. 애늙은이라 노인정에도 못가고, 공원에 가서 혼자 앉아 있을 수도 없다. 겨우 뒷산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재수가 좋으면 같이 갈 사람이 있어 산에 같다 내려와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더벅더벅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다른 백수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그만의 전쟁이 시작된다. 가까운 곳에 사는 작은아들 부부는 맞벌이다. 그래서 손자 둘을 외할머니가 돌봐주는데,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친할머니에게 맡기고 간다. 그럴 때면 손자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손자를 돌보는 일은 가히 막노동보다 더 힘들다. 더구나 큰손자는 만화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채널전쟁까지 치르워야 한다. 만화만 틀어달라는 손자 때문에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스포츠중계를 볼 수가 없다.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채널을 돌리면 아예 들어 누워 ‘할아버지 싫어, 만화 틀어줘!’라고 울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손자 편을 든다. 애들이 보고 싶은 것을 틀어주라는 것이다.
손자들 비위 맞추면서 놀아주고, 밥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넘어져 다칠까봐 두 눈 부릅뜨고 잘 지켜줘도 칭찬은커녕 아내의 불만은 또 이어진다. 어쩌다 사투리나 촌티 나는 말을 쓰면 금방 태클이 들어온다. 애들이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배우니까 제발 사투리 좀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꼴이 됐다. C씨는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탄식하면서 이리저리 전화하다가 별 볼일 없는 백수 하나를 불러낸다. 가까운 곳에서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씩을 나눠먹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알딸딸한 술기운에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그는 내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눈을 뜰 것이다. 그가 안쓰럽다. 아직 나는 아침 8시면 출근할 일자리가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