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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에서 멀어진 시간    
글쓴이 : 임매자    12-09-24 21:51    조회 : 3,525
중심에서 멀어진 시간
 
 

  “오늘은 뭘 할까?”
 
  아침에 눈 뜨면 우리 부부는 습관처럼 서로에게 묻는다. 이 하루라는 순금과같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행복감으로 가득 채울지를 궁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쉰 살밖에 되지 않은 후배의 와병 소식을 듣고 병문안하러 다녀온 며칠 후에 그녀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해제되지 않은 생의 그린벨트 안에서 30년 이상 함께 지고지순한 관계를 이어오던 후배의 죽음. 갑자기 가슴 속이 뻥 뚫려버리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도 그녀에 대한 추억은 질긴 명함처럼 찢어지지 않고, 이처럼 문득 삶의 부질없음에 쓸쓸해지고 또 겸손해졌다.
 
젊어서부터 병약했던 내게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깊숙한 곳에 찔러 두지 않고 습관처럼 수시로 꺼내 들었다.  그래, 삶은 불확실한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확실한 매듭이지. 후배의 죽음 이후에는 일부러라도 순간마다 죽음을 떠올렸다. 그래야 남은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내 삶의 잔치 마당을 열어 순간마다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맨몸으로 왔으니 온 세상이 통째로 선물이 아닌가. 선물도 마냥 지고 다니면 짐만 된다. 그때그때 풀어보고 행복해하자.
 
  봄을 만나러 강화도로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은 묵상에 잠긴 채 칙칙한 겨울의 경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동장군은 겨우내 산과 들, 그리고 나무들까지 슬픈 누드로 정렬시켜 놓고 내내 침묵만 시키더니, 불과 며칠 만에 어김없이 봄에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 버렸다. 얼음 깨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땅속의 푸른 기운들이 힘껏 박차고 오르는 소리, 꽃망울 터지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가 모두 봄의 공기 속에서 화음으로 번진다. 생명의 신비와 부활의 노래를, 새털처럼 가볍게 깊은 호흡으로 들이마신다. 그저 살아 있어서 기쁜, 이 놀라운 축복.
 
  우리는 모두 맨몸으로 왔으니 온 세상이 통째로 선물이 아닌가. 선물도 마냥 지고 다니면 짐이 된다. 그때그때 풀어보고 행복해 하자.
  어느덧 철조망에 찢겨 너덜거리는 활활 타는 노을 속에 한 무리 새떼가 불꽃처럼 타고 있었다. 발목을 적시던 어둠이 얼굴까지 찰랑대자 새들은 적막을 깨물고 모두 자기 둥지로 날아가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아늑한 자기의 굴로 들어간다.   이제 팍팍한 생활 전선에서 떠나 욕심의 우물에서 벗어나니 생의 영토가 넓어졌다.
 
햇살의 충만함, 나뭇잎의 싱그러움, 커피 한 잔의 뭉클함, 그리고 꽉 찬 하루를 보낸 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느끼는 이불의 뽀송뽀송한 감촉, 이렇게 무심코 보아 넘기던 사소한 일상사들에서 순금 같은 삶의 무늬를 꺼내 행복하게 엮는다. 그러나 가끔 예민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과 몸이 줄이 닿아있는 듯, 찌르르 감전되어 신기하게도 몸도 같이 아프다. 반대로 일상의 하찮은 입자들 속에서 기쁨을 찾아 배가시키면 창백했던 마음이 이상하게도 해맑아진다.
 
특히 잠자리에 들 때는 그날의 우울을 껴안지 않고 산뜻하게 이별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내게 올 즐거움을 맞이할 수 있다. 우울을 통째로 껴안고 잠을 자면 그 다음 날 찌뿌듯한 불쾌감 때문에 그 다음 날도 망쳐버리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 이런저런 지병과 동거를 하고 있다. 어디 아프지 않은 생이 있을까.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생이 있을까. 아마도 아픔만큼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일깨우는 것이 없고 죽음만큼 눈부시게 삶을 환기하는 것도 없으리라.
 
  시간은 움켜쥔 손안의 모래알처럼 새고 있다. 한 주가 끝나는 주말, 한 달이 마감되는 그믐날, 한 해가 저무는 섣달에는 까닭 없이 우울하여 마음이 절망으로 치닫는다. 그럴 때면 비탈에 선 외로움을 다독이고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주워 줄을 세워 추억을 줍는다. 토마스 칼라일은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없다. 시간은 우리가 딴 짓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저만치 도망쳐 버렸다.”고 했다.

  나도 젊을 때는 하얗게 널려있던 많은 시간 속에서 순간마다 열심히, 강렬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매일 가슴 떨리는 감동을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생을 소각하고 말았다. 이처럼 딴짓을 하며 사는 동안 시간은 빨리 흘러가버렸다. 지나간 시간을 반성하고 가다듬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지만 어제에 발목이 잡히고 내일에 멱살이 잡혀 오늘을 망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어제에 갇혀 허덕이거나 허황된 내일의 꿈만을 쫒는 사람에게 오늘을 살라며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경주 도심 한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아있는 고분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 무덤들은 태고로부터 흘러온 시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해온 우리네 삶을 보여주고, 죽음은 이렇게 자연으로 순순히 돌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듯했다. ‘우리는 희로애락의 삶 속에서 풀잎처럼 결국 너나없이 스러지고 이를 통해 저렇게 생명이 순환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이런 단순한 삶의 법칙 앞에서 차라리 구원의 한 자락을 보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삶이란 녹고 있는 얼음판이고, 우리는 그걸 타고 지금도 어디론가 물 위를 흘러가고 있다. 그 얼음판은 자꾸만 작아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 녹아버리고 우리는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겨 흐르리라. 그래서 누운 부처처럼 하루의 절반쯤은 비스듬히 늘어지려고 한다. 그리고 시야가 흐리면 바위 턱에 앉아 쉬어가고 등짐도 좀 내려놓고. 바람이 등 두드려 달래주면 내 외로움 땅에 내려놓고 쉬리라.
 
그러나 눈이 허락하는 한 느리게 활자를 읽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신이 맞춰놓은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미련을 떨치고 가리라. 이미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진 내 나이가 문득 무거울 때가 있다. 그래도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나 고마운가. 다만 남아있는 시간에는 제발 반성해야 할 일이 나날이 줄어들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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