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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나무    
글쓴이 : 공인영    12-11-04 17:11    조회 : 4,455

겨울 나무


 
  첫눈도 별 수 없다.
  정오의 햇살에 다 녹아 질척해진 길을 따라 걷는데 낙엽 소리가 발밑에서 자박거린다. 그래, 하나 집어 들고 보니 갈라진 잎 위로 오돌토돌하게 솟은 게 마지막으로 내쉬다 굳어버린 숨결 같아 괜히 애틋하다.
 뾰루지들이 딱지 뗀 자리마다 봉긋한 연두 빛 숨을 쉰 게 엊그제 같은데 녹음과 단풍 숲의 바람으로 흔들리나 싶더니 계절은 어느 새 텅 빈 겨울나무에 걸려 있다. 그런데도 나무는 제 몸의 변화에 어쩌면 저리도 말이 없을까.
 사람들의 하얀 입김에 이미 숱한 겨울 이야기가 새어 나갔지만 그 중에 하나쯤은 오직 내 눈과 귀와 마음을 통해 만나고 싶던 차였다.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높은 가지 위에 앉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깍깍댄다. 나무와 모처럼 긴 안부를 나누는 모양이라 그 속내가 궁금해 나도 슬쩍 나무 아래로 다가간다.
 잎은 바람에게 몽땅 내어주고 양분도 다 쓰여져 대지로 돌아간 지금, 남은 기운으로나 겨우 섰을 나무를 바라보자니 존재의 고단함은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하늘을 향해 벌린 팔을 그만 내리고도 싶을 만큼, 가끔씩 제 몸을 흔들며 굳어버린 감각을 풀어내는 동작들마저 애처롭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말이 없고 순종으로 이 혹한의 날들을 견딘다. 겨울이 되기도 전부터 입버릇처럼 허전하다던 나는 이렇게 늘 한 수 모자란 수다쟁이로 시끄러운데.
 나무엔 나이테만 있는 게 아니구나. 팔과 다리마다 굳은살도 참 많다. 갈라지고 터진 틈새로 문득 친정어머니의 주름진 손등도 스쳐간다.
 혈압으로 처음 쓰러진 아버지의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만도 못한, 겨우 마흔 둘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 앞에 자식은 그저 아득한 현기증이었으리. 여자는 접고 다만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은 고맙게도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지혜를 만들었고 아이들은 그 힘으로 잘 자라주었다. 그리고 겨우 제 몫의 자리에 서게 될 즈음, 아버지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사랑하는 사람만 따라다니던 십수 년의 마지막 눈길도 다 놓아버리고 그저 천진한 미소만 남긴 채 고요히 눈물의 강을 건너가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도 흔들리던 그때로부터 어머니는 또 얼마나 숱한 날들을 저 겨울나무처럼 사셨을까. 벗어주고 또 주고, 개미허리처럼 당신을 졸라매 네 자식을 키워낸 절박함은 그 어떤 설명으로도 다 복원해낼 수가 없다.
 머릿속 가마에까지 설움이 들어차더란 외할머니의 말씀을 위안 삼고 당신의 어머니도 그렇게 감내한 세월이기에, 보란 듯 이겨낸 지혜로운 내 어머니. 이제야 추억인 양 눈시울 적시는 모습이 문득 저 겨울나무와 겹쳐져 가슴 뻐근하도록 아프게 한다.
 사람들의 눈길이 잠시 외면하는 계절, 고독한 존재가 되어 안으로 들인 제 마음을 키우는 겨울나무처럼 의연했던 어머니 앞에 이 딸은 지금 얼마나 맘에 드는 자식일까.
 어느 새 나도 자식을 키우는 어미가 되었지만, 머리와 가슴을 아무리 모아도 따를 수 없는 그 온전한 희생과 인내를 나무는 이 계절에 다시 한번 일깨운다.
 겹겹의 욕심은 이 며칠 사소한 다툼 끝에 기어이 상처를 내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내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고 속상하게 한다. 그러나 겨울나무는 비우고 버림의 깨달음만 주는 게 아니라 살면서 수시로 만날 억울하고 분한 생각들을 다스리기 위한 인내까지도 가르쳐 주리라.
 인생이란, 시간에 얹혀 대를 물리는 아픔과 통증들이 가끔씩 뜨거운 깨달음과 보상으로 치유되며 가는 여정같다. 그래서인지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 텅 빈 충만이 여전히 휘청거리는 내게, 비계처럼 붙은 욕심을 쳐내 좀 더 가벼워지라고 타이르는 것 같아 고맙기까지 하다.
 어쩌면 겨울나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저 고독한 존재를 보며 깨달음을 얻는 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려니, 사람이 나무보다 조금만 더 나은 존재일 수는 없을까.
 뼈만 앙상한 겨울나무는 다시 보아도 내 어머니를 닮은 아름답고 눈물겨운 참 몸이다. /  
                 
                                                                                                  <수필과 비평.2004.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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