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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공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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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e in family    
글쓴이 : 공인영    12-11-04 17:41    조회 : 4,296
Made in family
 
 
 
 
  찬거리를 다듬다가 그만 새로 산 칼에 쓰윽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햇수로 이십 년도 넘은 주부라 이제 노련미로 광이 나야 할 판에 영 스타일 구긴다. 하지만 이건 새 것이라 너무 잘 드는 식칼 탓이다. 빨갛게 배어나오는 피가 멈추질 않으니 놀란 중에도 ‘살아있음'에 관한 생생한 확인으로 몸 어딘가 시큰하고 찌르르하다. 날의 무딤이나 날카로움에도 적절한 도(度)가 필요하다. 세상 사는 일의 지혜가 칼날에도 숨어있다니, 조심히 다룰 일이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집안을 치우며 주말에 있을 조촐한 가족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처럼 친정 식구들이 근처로 와 점심을 한 뒤 뒤풀이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다. 큰애가 재수를 하는 동안 배려한다고 자주 보지도 못한 가족들, 애들 외할머니를 비롯한 친정붙이들을 집으로 불러 밥 한 끼 나누는 일이 왜 그리도 어렵던지. 그래도 시간이 이만큼 흘러 송별회를 겸하게 되었다.
  홀시아버님 모시는 까닭에 오시고 싶어도 내색 못하는 친정 엄마의 마음을 왜 모를까. 어쩌다 근처로 와 만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맘고생은 없는지 슬쩍 들여다보고도 싶었을 그 궁금함을 돌려세워 때마다 여동생네로 향하게 해드려 죄송하던 차다. 이번엔 작정하고 시간을 보내자고 하니 다들 저리도 반기며 좋아라 한다.
  가만 보면 속내 한 자락도 조심하며 화도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사느라 바쁜 통에 살짝 부족한 왕래가 아쉬워 모이는 날만큼은 늘 웃음 가득 화기애애하다. 그래도 삶이 항상 즐거울 수야 있나. 집안일로도 생각이 다르고 저마다 일가(一家)를 이루며 터득한 삶의 방식으로 혹 삐걱거린 데도 당연하거늘, 지금껏 말다툼 한 번 해보질 못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와 살짝 아쉬워진다. 험한 말 한 마디 입 밖에 놓질 못하고 어쩌다 서운함도 눈길로나 전하고 돌아가 제 집 속에 들앉아서야 혼자 끙끙거렸을 게 뻔한 형제들이겠기에. 하지만 새로 발라 깨끗하던 벽지도 시간이 흐르면 거뭇하게 때가 타는 법, 마음에 조금씩 들러붙는 이견(異見)과 불편들이 우리 사이에도 분명 쌓여왔을 텐데. 아무도 제 맘 한 번 속 시원히 풀어내지 못했구나 싶다.
   상처를 주기 싫다는 건 아마도 받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래서 좀 더 대범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탓에 온전한 소통이 어려운 게 어디 형제간뿐이랴.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상처가 두려워 그걸 넘어 더 깊은 가족애로 거듭날 기회를 놓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핏줄이란 어떻게든 흘러가 결국 하나로 닿는 뜨거운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좀 편안해지고 싶다. 최선을 다하되 의례와 도리에 너무 묶이지도 말고 실수하고 잘못도 해 가며 꾸지람도 사과도 기꺼이 나누면 좋겠다. 때로는 그 품에 엎어져 펑펑 울어도 보고 싶다. 그러면 사는 게 훨씬 덜 외로울 것 같은데, 그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갈등은 삶을 견고하게 하는 영양제 같은 거였다. 참고 양보하는 게 능사라며 기를 쓴 덕분에 앞으로 나아간 게 결코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 할 시간 앞에 속속 도착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지혜마저 낡고 진부한 것으로 취급되는 세상이다. 다시 내 아이들을 그 융통성 없는 속으로 밀어 넣고 작은 일들에 매여 마음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형제간의 지나친 예의도 재미없다. 그보다는 가끔 부딪히고 뭉개지더라도 몸으로 얼싸안는 게 좋겠다. 우리 사남매도 마음의 용량을 과신하고 희생이란 허울에 갇혀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 조금만 더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도 삶이 훨씬 유연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핏줄들도 다를 리 없다.
   이제 사느라 접어둔 거리마저 다시 펼치고 바짝 다가앉아 그리움을 해갈하는 중이다. 얼마 전부터는 인터넷에 가족카페도 만들어 때마다 제 집안 소식들을 올리고 즐겁게 들락거리니 다소 의도적인 노력이라 해도 이런 건강한 도모(圖謀)는 주변에도 권하고 싶다.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목이 컬컬해지고 뱃속도 다시 출출해지는 저녁이 오면, 기다란 나무 탁자에 마음대로 팔 괴고 둘러앉아 고소한 해물 파전을 쉴 새 없이 부쳐다 먹을 것이다. 물김치와 배추김치 그리고 총각김치도 다 꺼내놓고 시원하게 우린 국물에 잔치국수를 말아 먹으며 향긋한 술도 한 잔씩 할 것이다. 여자들을 위해선 맛 좋은 와인도 한 병 사 두었다. 마침 행사 때라 와인 잔 두 개가 덤으로 따라오니 하나가 모자라고 새로 하나가 더 필요하던 차에 딱 잘 된 일이다. 운도 참 좋다.
   그렇게 한때를 보내며 곧 외국으로 떠날 큰아이에 대한 축원과 덕담도 한가득 챙겨놔야겠다. 낯선 곳에서 혼자 생활할 아이가 길고 긴 외로움과 두려움에 맞서도록 부모님이 물려주신 가족 표 사랑을 듬뿍 묻히고 가방에도 잔뜩 실어 보낼 참이다. 무엇보다 지금껏 우리를 묶어온 오래된 우애의 힘으로 무장시켜 보낼 것이다.
   떨어져 그리웠던 가족을 만나는 일은 늘 애틋한 설렘이다. 준비로 고단하든 대접할 여유가 좀 모자라든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저 한곳으로 향할 모두의 마음만으로도 그날 우린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 부자가 되고 또 충분히 행복한 패밀리로 거듭날 것이다.
 
                                                                                                   < 책과 인생 2010 .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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