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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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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뜰한 당신    
글쓴이 : 조헌    12-11-10 19:09    조회 : 4,347
 
알뜰한 당신
 
                                                                          조      헌                                  
 화창한 5월 어느 날 오후였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이 빠듯해 급히 집을 나선 내가 버스 정류장에 막 도착했을 때다.
 “여 봐요, 젊은 양반! 예서 이문동을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해요?” 한 할머니가 불쑥 말을 건넸다. 유독 길눈이 어두운 내게 강남에서 이문동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곳이었다. 몰라서 죄송하다며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니 일흔을 훨씬 넘긴 연세임에도 아주 정정한 모습이었다.
 야위긴 했어도 작달만한 키에 옥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연분홍 스웨터를 걸친 옷매무새가 계절과 딱 맞아 산뜻했다. 다만 무청이 그대로 달린 커다란 무 하나를 오른 손에 쥐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쑥한 모습으로 보아 자손들이 극진히 섬기는 부잣집 마나님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축 늘어뜨려 땅에 끌리게 들고 있는 그 무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느닷없이 “난 어서 이문동엘 가야하는데 이걸 어쩌지! 우리 아들이 눈 빠지게 기다릴 텐데, 이 무 좀 사줘요. 이걸 팔아 아들집엘 가야해요.” 놀라 쳐다보는 나의 눈길을 피한 채 할머니는 거듭 중얼거렸다. 좀 전 길을 묻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시르죽은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거였다.
 치매노인이었다.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이렇게 직접 만나니 당황스러웠다. 자꾸 무를 들이대며 사라고 떼를 쓰는 할머니를 달래 나는 근처 파출소로 모시고 갔다.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용케 정신이 돌아와 주소와 전화번호를 대는 분들도 있고, 아니면 자식들이 사방팔방 찾아 헤매다 어렵게 연락이 돼 모셔가는 경우도 있죠. 어쨌든 좀 기다려 봐야 해요.” 나는 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파출소에 남기고 거길 나왔다. 의자에 얌전히 앉은 채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할머니 손엔 여전히 무가 들려 있었다. 

 30분이나 늦은 나를 친구는 반갑게 맞았다. 늦게 된 사유를 이야기 하며 나는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공교롭게도 그 속에는 노인요양병원 입원수속에 필요한 재정보증서류가 들어 있었다. 얼굴이 상해 반쪽이 된 친구는 기운 없이 그걸 받아 가방에 넣었다.
 친구어머니는 4년 전 치매진단을 받았다. 유별나게 말수가 적고 얌전하셨던 분이다. 하지만 치매로 인격을 잃어버린 후 무던히도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처음엔 그저 같은 말을 되묻고 소지품을 종종 잃어버리시더니 언제가 부터는 간단한 계산도 못할 때가 있어 애를 태웠단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한참을 더듬거리다가는 끝내 하지 못하고 화가 난 표정으로 온종일 말없이 계실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건망증이겠지 싶어 지나쳤는데, 증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자꾸 심해지더니 급기야는 없는 말을 지어내 주변을 당혹케 하고 가끔씩은 가족마저 알아보지 못해 기겁을 하게 했다.
 “아줌마는 날 어떻게 알아요? 대체 누군데 이렇게 잘해줘요. 난 잘 모르는데......” 시집간 딸을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하고 때론 막내아들을 친정동생으로 착각해 온 집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였다. 나중엔 음식을 해야 한다며 틈만 나면 가스 불을 켜는가 하면 성냥만 보면 아무 곳에나 그어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렇듯 병세가 점점 심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입원을 시키겠다는 친구와 입장이 다른 동생들 사이엔 갈등의 골이 깊어갔는데, 결국 작년 여름 우여곡절 끝에 요양원 입원을 결정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원생활은 고작 보름 만에 막을 내렸다.

 입원 후 2주가 지난 일요일.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갔던 친구는 그만 억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큰아들만큼은 정확히 기억하는 어머니가 친구의 목을 덥석 끌어안으며 “나 집에 가고 싶어. 아범아! 제발 집에 데려다 줘!” 겁에 질린 듯 몸까지 떨며 애원을 하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어깨엔 주먹만 한 멍이 들어있고, 팔 뒤꿈치와 허벅지에도 여러 군데 꼬집힌 자국이 선명했다. 가슴이 너무 쓰려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눈물을 쏟자 “울지 마! 울면 저 할머니들이 자꾸 꼬집어. 울지 말라니까!”하면서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거였다. 홧김에 사무실로 달려가 항의하자, “여섯 분 당 한명씩 간병인을 두지만, 잠시 눈을 떼면 어느 틈에 저런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여하튼 저희들 불찰이지만, 갑자기 난폭하게 돌변하는 할머니들이 간혹 있어 애로사항이 많답니다.” 친구는 두말 할 것 없이 그 길로 당장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 하던 일을 줄여 아내에게 떠맡기고 내가 간병을 전담했지. 하루에 일곱 여덟 번 식사를 차려드리고 그 수만큼 대소변을 받아냈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어머니를 옆에 두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또 씻기는 것을 하루에도 서너 차례 반복하다보면 눈코 뜰 새도 없었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담한 것은 날로 심하게 변해가는 어머니를 속수무책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점이야.” 친구는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쉬었다. “헌데 며칠 전엔 기르던 고양이를 목 졸라 죽여 옷장 속에 숨기곤 시치미를 떼시더라고.” 듣던 나는 너무 놀랍고 섬뜩해 머리가 띵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동생들의 권유도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다시 요양시설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전보다는 시설도 좋고 안전한 곳 같은데 재정보증인을 세우라기에 네게 부탁한 거야.” 그러나 친구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식사라도 하자는 나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그는 서둘러 갔다.

 친구의 경우처럼 우리 사회도 치매로 인해 갈팡질팡 흔들리는 가정이 늘다보니 이젠 강 건너 불만은 아닌 것 같다. 더욱이 병의 특성상 개인이나 가정이 책임지고 보살피기엔 너무 벅찬 일이다. 이제야말로 사회가 나서서 좀 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궁리를 하며 집으로 오던 중, 나는 파출소 앞을 지났다. 그런데 너 댓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까 그 할머니가 여전히 앉아계시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돼 찾아 들어간 나에게 “좀 전에 아드님과 통화가 됐어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곧 도착할 거예요. 살살 달래서 뒤져보니 안주머니에 전화번호 쪽지가 있더라고요.” 경찰관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흥얼대고 계셨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 당신이 몰라주면 그 누가 알아주나요. //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 무슨 까닭에 모른 척 하십니까요.” 할머니가 젊은 시절 자주 불렀을 유행가 한 구절을 고개까지 까닥이며 계속 반복해 부르는 거였다. 나는 그만 코끝이 아려왔다.

 이제 내일이면 그렇게 싫은 요양병원으로 다시 가야 할 친구 어머니와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래를 흥얼대는 저 할머니, 그리고 수심이 가득 차 울가망이 된 친구의 얼굴과 허둥지둥 파출소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또 다른 아들의 근심어린 얼굴이 겹쳐지자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서쪽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지는 해는 저렇듯 아름다운데 우리네 인생은 저물도록 왜 이토록 맵고도 짠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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