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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머신    
글쓴이 : 정모에    13-02-04 20:27    조회 : 4,062
타임머신
 정모에
 몽환 가운데 깼다.
 몽롱한 가운데 두 남자를 생각해 본다. 동면이 덜 깬듯한 건장한 삼십대의 삼손 같은 해룡이와 춘삼월 미풍의 맛을 본 20대의 옥윤이다. 광선이 지나가듯 한 남자가 살포시 잠 이든다. 그 시간 나도 짧고 긴 몽환 속에 회오리 바람을 타고 낯선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그들은 그들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고개를 떨구며 몸의 힘이 빠졌다. 그 이후 내 느낌은 ‘아 그가 자고 있구나’ 였다.
비 내리는 어느 날 퍼머를 하러갔다. 윤이, 내가 단골이 된 지 3년 째. 그 미용실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작은 체구의 그가 꼭 있다. 늘 왕소금 왕창 뿌려 저려 놓은 김장 배추처럼 피곤에 절여져 있거나 그도 아님 뙤약볕에 뽑혀진 한 다발의 쪽파처럼 축 늘어져있다. 2개월여 만에 볼 때면 피곤이 겹친 눈에 볼 살이 빠져 이 빠진 노인처럼 퀭하니 들어간데다 몸은 말라있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무표정의 로봇처럼 열 평 남짓의 가게 안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종일 수없이 돌며 손이 마를 시간도 없다. 남자로 영글어야 하는 시점을 온통 퍼머의 조수역을 하며 솜씨를 익혀가는 청년의 부지런함은 남 달라보였다. 날마다 노력과 실력을 저금하는 윤이는 훗날 비달사순(영국의 헤어디자이너)처럼 실력을 인정받는 명인이 될 것이라 기대 해본다. “샴푸 해 드릴께요.” 샴푸대에 머리를 맡기면 온수가 나오고 거품이 일 때는 손의 박자가 신나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 같더니 헹굴 때는 금세 ‘봄날은 간다’로 바뀌었다. 이내 린스를 하기 전 그의 손가락은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고’ 자장가로 바뀌어 내 머리카락에 흐르는 샤워기와 젖은 머릿결을 붙잡고 타임머신으로 그는 떠나고 있었다.
 난 안다. 누적된 피로 속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던 그가 그날 오후엔 두 다리가 풀리며 눈이 감겨버린 것이다. 샴푸대 앞에 서서 잠에 빠져 있는 그, 깨울 수 없는 윤이를 향해 또 다른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나도 눈을 감고 내 젊은 날들을 던졌다. 부메랑으로..... 들 풀처럼 싱그러웠던 청춘의 묘미들이 날 유혹했던 날들은 나를 성숙하게 했었지.
 벌들이 내게 올 줄 알았던 청초한 꽃 한송이. 첫 벌에 쏘여 기절해 버린 맏이라는 그 무게에 나는 죽은 듯 삶에 항복 했었다. 결혼으로......벌에 쏘인 상처는 아픔으로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사치스런 향기가 남긴 심장, 소리 없는 삶의 총구멍을 두 손으로 막으며, 인생은 밉기도 싫지만도 않다는 것을 회상할 때쯤 윤이는 손목의 힘이 완전히 떨어지며 샤워기 물소리만 내 귓전에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결에선 손을 떼지는 않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그 두 손에 젖은 머리를 놓치도 않은 채 기억 저편으로 날아가며 혼자가 아닌 듯 사랑의 묘약인 달콤한 키스라도 했을까?. 그들은 일곱 색깔무지개를 향해 손잡고 달려가고 있는지 난 그만 그의 잠을 용인했었다. 그의 피곤함을 알기에.
 이젠 돌아오렴. 뒷목이 너무 아파 윤이를 깨웠다. 쉴 수 없는 그의 일과와 쉴 수 있는 찰라일뿐 그는 스스로 잠이 든걸 몰랐었나 아니면 미안해서일까?
윤이 엉뚱하게 “염색은 언제 하실래요”? 난 거울 앞에 젖은 머리로 고개를 살랑 살랑 저으며 앉는다. 저 여자가 진짜 나 맞아? 기대 밖의 60대 모습이다. 내 등 뒤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주던 두 눈동자는 충혈이 되었고 잠을 더 원하는 아쉬움의 초점 잃은 초점. 그를 향한 팁은 내 지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남자 해룡이, 그는 나와 세 번째 만남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가운을 바꿔 입었다. 미지근한 한약초 물에 발을 담그고 3~4분 후 해룡은 수건 한 장을 들고 와 내 젖은 두 발을 닦아 주었다. 그리곤 15W 정도의 낯은 불빛이 비취는 침대에 변기처럼 뚫린 큰 구멍 속으로 얼굴을 박고 엎드렸다. 친구 연경이는 옆 침대에 눕고 우린 스포츠오일 마사지를 받는다. 여자의 손길 보다 난 남자의 우직한 누름이 좋고 또 강하고 세게 받는 편이다. 아흔 아홉 칸 부잣집 마님이 된 기분으로 힘 좋은 해룡은 뭉친 어깨와 허리를 맛사지 해주며 혈을 따라 S라인이 나올 느낌으로 난 힘을 빼며 몸을 맡긴다. 거친 호흡 만큼이나 뭉쳤던 근육은 홍두깨 같은 두 팔과 수기로 풀고 있었다. 허벅지와 종아리 발바닥 혈이 도는듯한 사이 “쌰모님, 돌아. 돌아.” 앞으로 반듯이 눕는다. 머리 팔 무릎을 지나 엄지 발가락을 뿅하고 훑어 내고는 점점 손가락에 힘이 빠지더니 새끼 발가락에서 그만 멈추고만 것이었다. 이 황소만한 젊은이가 여태껏 잘하다가 내 새끼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이 모자랐는지 순간 잠이 들어 버린 것이었다. 아니, 이건 또 뭐람? 몇 분이 지나자 내가 살짝 움직였더니 이내, 놓칠세라 그 몸집에 어울리지도 않게 조물락 조물락 거리고 있었다. 모습을 상상하니 가엾어 깨우지도 못하겠고 웃음만 킥킥 나왔다. 깊은 꽃잠 속에서 밀야를 즐기 듯 내 발가락을 또 낚아챈다. 내 발가락은 좋다고 따라간다.
 내 상상에는 지 마누라의 풍만한 가슴을 헤치고 젖꼭지를 만지는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어찌 내 몸에서 반딧불이 짝 찾듯 불이 반짝거린다. 빛을 잃어버린 전구 3촉짜리가 번개 치듯 번쩍 하더니 사라져 버린다. 이 나이에 외간 남자가 새끼발가락 끝을 만지는데도 짜릿 했지 않은가 말이다. 두꺼비 전원이 아직 안나간 모양이었다. 그 순간 해룡아 뭐하니? 할 수도 없고 음~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에구머니나 망칙스러워라. 옆 침대를 보니 친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역동의 호르몬은 소진되어 버린 지 오래다. 해룡은 새벽까지 일을 한다는데 언제나 잠이 모자란다 한다. 모른척 해야 옳을 것 같아서 그래, 새끼발가락 하나쯤이야. 이 판에 너 맘대로 해라 선심 쓰고선 나도 타임머신 타고 젊은 날 불꽃놀이 같았던 그때로 돌아가 본다. 그땐 새끼발가락은 명함도 못 내밀었었지. 해룡이 너무 곤히 잠들어 버린 통에 독도처럼 끝에 있는 발가락 덕분에 해룡이 좋은 꿈꾸게 했더니 뜻밖에도 전기의 전원을 발견했다. 수지맞는 일이었지. 일찌감치 포기했던 여자라는 그 이름 속으론 생기가 돌았다. 거울만 안보면 돼. 헌대 몸이 아픈 건 숨길 수 없잖니? 난 또 나에게 대꾸했다. 두꺼비 집? 니네 집에 가니까 그거 없던데?
 쌰모님! 아이 깜짝이야. 내 생각을 들켰나? 해룡 대뜸 “나 내일 중국 가. 와이프 아가 낳아” 언제 지가 잠잤느냐는 식이다. 난 조금 더 몽상 속에서 나른하고 싶은데...... 한국 말을 뉘 한테 밑도 끝도 없이 배운 모양새로, 몇 마디가 언제나 반말이다. 한 달 있다와. “쌰모님 또 와” 엄마 아빠가 된다는 그들. 팁을 건넨다. 오늘은 조금 후하게. 축하해~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 좋은 날이 올거라고 말해주었다.
두 남자에게 응원을 한다. 나아가 모든 젊은이들에게 전한다. 노력은 당신들을 행복하게 지킬 것이라고...
  그 후 그곳엘 갔더니 해룡은 오지 않고 데스크에서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몇 달이 지난 지금 내 새끼발가락은 자꾸 또 가자구 보챈다.
  왜 나 말고 니가 더 좋아하는데?
  201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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