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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유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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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이름    
글쓴이 : 유시경    13-02-15 02:31    조회 : 5,561

바람의 이름
 
 ‘사랑은 다만 몸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사는 남자가 있다. 그는 밭에 나갔다 오자마자 제 아내를 불러 중대발표를 한다.
 “당신, 바람 본 적 있어?”
 안 들으면 후회할 거라며 마치 일급비밀을 터뜨리려는 스파이처럼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앞에 앉혀놓는다. 못이기는 척 속옷 바람으로 앉은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러곤 카메라 렌즈 앞에서 포즈를 취하듯 최대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여본다.
 “있지, 농사일은 잡초와의 전쟁이거든? 내가 오늘 온종일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에서 그 많은 풀을 다 뽑았는데 말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옷을 훌훌 벗어던졌지. 그러고 나서 아랫도리만 가리고 그늘에 떡하니 앉았는데 말야.”
 “으응, 그래서요?”
 귀를 쫑긋거리는 시늉으로 바짝 다가가니 그가 신이 나서 말한다.
 “팬티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서 쉬는데 말이지. 글쎄 저쪽에서 뭔가 나풀나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이는 거야. 실 같은 레이스 한 자락이 이쪽으로 길게 날아오고 있지 않아? 아! 그건 바로 바람이었어. 감 나뭇가지를 지나고 사과 나뭇잎 새를 지나서 누런 호박꽃 위에 잠시 앉았다가 하얀 고추 꽃망울을 떨어뜨리면서 처언천히 날아와 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훑고 있잖아.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 어여쁜 바람에게 내가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당신, 그게 뭔지 알아?”
 “모르지요. 바람의 혀라도 되나요?”
 나는 시큰둥해져서 되물었다.
 “그것이 말야. 여인의 옷자락처럼 살랑살랑 하느작거리면서 내 몸을 막 간질이는 거야. 아, 꿀 같은 바람.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고 달콤한 바람이 어디 있을까 싶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붙여주겠노라!’ 했지. 이제부터 너는 란제리다! 란제리 끝에서 하늘거리는 레이스 같은 바람. 그래서 ‘란제리 바람’이라고. 어때, 기발하지?”
 책만 펴면 잠이 든다는 이 남자, 이십여 년 간 아내와 단 한 번도 똑같은 영활 본 적 없고, 릴케가 왜 장미가시에 찔렸는지, 루 살로메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베르테르가 왜 슬퍼했는지 관심 밖이라는 남자. 그럼에도 예술은 사랑을 뜻하는 것이요, 사랑은 바로 ‘성애(性愛)의 구현’이라 주창하며 사는 남자. 그러나 세상살이에 풍화되면서 정작 ‘사랑밖엔 난 몰라’보다는 ‘일밖엔 난 몰라’에 익숙해져버린 남자. 그런 그가 접신(接神)한 나비 한 마리처럼 자신의 문학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란제리’보단 ‘시스루’가 더 매력적이지 않느냐 물었더니 고칠 생각 없단다.
 시스루든 란제리든 폐일언하고. 저 푸른 초원에서 바람과 내통하고 들어온 검은 몸빛의 남자, 이내 아내의 속곳을 잡아당기고 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연상 작용을 어이 하랴. 사랑은 온몸으로 하는 것, 우린 서로 시스루니 란제리니 박박 우기면서 밤새 뜨거운 바람으로 날아다녔다. 그것은 필시 ‘란제리 바람’이었다고 부르짖는 그일 이길 방도는 없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빗방울의 모양, 꽃잎의 떨림 등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에 의해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뿐. 때론 맹수의 포효처럼 때론 여인의 레이스자락처럼 다가오는 바람의 길이를 예측하는 건 그것을 마주본 자만의 몫일 터.
 누구, 바람 본 적 있는가.
 
 - 2011년 <월간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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