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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숙의 잔(盞)    
글쓴이 : 유시경    13-02-15 02:49    조회 : 6,858
시숙의 잔(盞)
 
 술 한 잔 대작하지 못하는 내가 처음으로 주도(酒道)를 알게 된 것은 임신 팔 개월 무렵이었다. 청량리 미주상가 뒷골목에서 남편과 월 오만 원짜리 문간방에 세 들어 살 때 태백에서 광산 일을 하시는 둘째 시숙이 올라왔다. 처서가 오기 직전, 팔월 삼복더위가 한창 절정에 이르다가 밤이 돼서야 푸르르 꺾이고 마는 나날이었다. 나는 민소매의 얇고 새파란 꽃무늬 임부복을 입고 있었는데 시숙은 보기에도 무척 시원해 뵈는 고의적삼을 입으셨다. 삼베인지 모시인지는 모르겠으나 탄탄한 흉근이 슬쩍슬쩍 내비치는 여름한복에 백고무신을 신고 종이 합죽선을 쥔 모습이었다.
 날줄과 씨줄의 성근 짜임새가 선명하니, 시숙의 까맣게 그을린 피부가 샛노란 바지저고리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렸다. 그것은 또 타령을 하는 저잣거리의 광대마냥 익살맞으면서, 역으론 권력을 지닌 항간의 양반네들처럼 그 위세가 당당해보이기까지 하였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인지 한량인지 딸깍발이 샌님인지 아니 그도 저도 아닌 탄광촌의 노동자인 시숙을 정중히 모셔야 하는데, 나는 그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은 달아오르며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아기를 낳아야 되는데 뜬금없이 찾아온 시숙이 나는 진실로 마뜩잖았다. 부랴부랴 우동집 일을 끝내고 들어온 남편은 형님과 아내를 데리고 청량리 바닥에서 가장 맛좋고 규모가 크다는 갈빗집으로 갔다.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원 없이 돼지갈비를 뜯었다. 술 궤짝이 모자라도록 형제는 잔을 부딪쳤으며, 누가 먼저 취하느냐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 내기라도 하듯이 술을 주문하였다. 소주잔에 코를 댈 때마다 알코올의 독기가 병원 응급실의 그것인 양 소독약으로 인식하는 이 몹쓸 놈의 감각 탓에 그들의 곁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 향기도, 맛의 구체성도 모를 주정(酒精)의 매혹을 누구는 댓잎에 맺힌 이슬방울이니 누구는 쓰디쓴 사랑의 묘약이니 누구는 고통을 잠재우는 독약이니 황홀한 마약이니 찬양하며 물마시듯 하는 이들이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몇 시간이 흘렀는지 두 남자는 탁자를 짚고 일어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청거렸다. “어어, 어어.” 하며 종업원 한 명이 다가와 그들을 부축하였지만, 형은 오랜만에 골육지정(骨肉之情)에 젖었는지 흘흘 웃으며 아우의 어깨를 감싸다가 그만 출입문을 붙들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비틀거리는 두 거구 사이에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세 사람은 신혼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은 내게 술상을 봐오라고 명했다. 먼 곳에서 형님이 오셨으니 이 밤이 짧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만고의 시름을 술독에 담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인간세계로 되돌아가길 거부하는 주선(酒仙)들에게 나의 주특기인 술국을 만들어내었다. 김치와 두부와 어묵을 기름에 들들 볶다가 식초 한 방울과 설탕 한 수저를 넣고 건더기가 최대한 부풀어나도록 끓이는 것인데 초라한 신혼의 주안상에 그보다 훌륭한 안주는 없었다.
 시숙은 내게 술 한 잔만 따라주면 안되겠느냐며 엄숙히 요청하였다. 나는 주법을 배우지 못해서 따를 줄 모르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곤 “제수씨가 따라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앉아있겠노라며 빈 잔을 더욱 높이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남편의 눈치가 따끔해지자 나는 할 수 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술은 채울 수 있을 만큼 잔을 채우다가 기어이 주둥이 밖으로 새고 말았다.
 “고만, 고만. 보래요 제수씨요, 고만 따르드래요.” 엉거주춤하니 무릎을 세우며 당황해하는 시숙의 언동(言動)과 동시에 그만 술이 철철 넘치고 만 거였다.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술병은 절대 왼손으로 잡아선 안 되고, 술을 따를 때는 안주를 오물거려서도 아니 되며, 술잔을 받을 때 말을 삼가야 하고, 술은 반드시 술잔의 칠 할을 채워야 하며, 술은 하늘이요 안주는 땅이라 그 이치가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가 지났다. 시월의 마지막 날을 이틀 앞두고 시숙의 영면 소식을 들은 우리 가족은 새벽길을 밟으며 동해로 향했다. 남편은 차를 멈추고 ‘바다가 보이는 휴게소’라 부제가 붙은 동해휴게소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동그랗게 차오르는 물거품. 한스럽고 먹먹하기 짝이 없는 가슴을 파도와 달빛에게 푸념하듯 늘어놓는 소리가 들렸던가.
 바람이 울먹이는 아이처럼 시숙이 잠든 장례식장의 유리창을 단단히 움켜쥐곤 두드려댔다. 한소끔 또 한소끔, 곡소리가 들릴 때마다 순박한 빗방울이 나뭇가지 틈새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을 나뭇잎들은 붉은 눈으로 더 크게 흔들리며 아우성을 쳤다. 검은 상복을 입은 조카딸들과 아들이 제 아버지의 영정을 묵언(?言)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상주(喪主)의 표정은 애처로우나 담담했고 동서는 “이제는 미워서 더는 울지 않겠다” 며 부르짖었다.
 염습과 입관을 마치고 난 뒤 제상에는 청주 대신 소주가, 향불 위론 시숙이 애용하던 담배 한 대가 놓였다. 지난 세월 내내 나는 방랑의 시숙을 사랑하지 못하였다. 무릎을 꿇고 머릴 숙이고 앉아, 음률을 타며 제문을 읽는 이의 소릴 들으니 나는 또 시숙과 화해하지 못한 일이 내내 억울해지고 마는 것이다.
 병실을 관통하는 주삿바늘처럼 슬픔에도 면역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비애를 다스리는 저항능력이라니, 선천적이라면 모를까 세상 어디에도 그런 면역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또한 시숙에게서 배운 ‘군자(君子)의 주작(酒酌)’이란 게 대체 무엇에 쓸모 있으랴. 절주(節酒)가 어디 생로병사를 조절하고 지배한다던가. 한 세상 애증의 관계조차 다 거두지 못하고 작별하고 마는 인간사 아니런가. 흐르도록 따르고 넘치게 사랑하여라. 그 고통이 손등과 소맷부리를 적시고 한삼자락 밑바닥으로 줄줄 새어나갈지라도.
 검은 넥타이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형제의 눈물이 또 내 마음을 강타한다. 영정 속의 시숙은 그때처럼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쏟아내고 또 붓고. 마시는 이 없이 받기만 하는 잔속의 술은 넘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나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가버린 시숙 앞에 술잔을 바칠 수가 없다. ‘치주안족사(?酒安足辭, 한 잔 술은 사양하고 말 것도 없음을 일컬음)’라 하였던가. 내가 어찌 시숙이 권하는 첫잔을 마다할 수 있을까.
 “제수씨요, 애정이 너무 넘치십니다. 고만 따르드래요.”
 나무로 된 술잔의 곡선을 타고 뭔가 자꾸만 흘러내리고 있는 거였다.
 
 - <현대 수필> 2013년 봄호, <선수필> 2013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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