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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집    
글쓴이 : 이정희    13-04-06 09:42    조회 : 4,823
존재의 집
-내 이름을 말한다
 
학정 이정희
 
 흔하디흔한 이름이다. 이정희(李貞姬). 부르기 쉽고 뜻이 좋아서인가. 고유명사가 분명한데 거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렸다. 교회에서는 하도 많아 내 이름 석 자 뒤에 알파벳 E가 붙어야 진짜 내가 되고, 스포츠 회원권은 앞에 아라비아 숫자 5를 붙여야 하며 여고친구들 사이에서는 ‘공부 잘하는‘ 이라는 부담스런 수식어가, 운동모임에서는 ’잠실’이라는 우리 동네 이름이 덧붙어야 나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어떤 기원을 담아 내 이름을 지으셨을까? ‘곧은 계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내 이름. ‘곧다’는 사전적으로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똑바르다는 의미와 마음이 바르다는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되고 있다. 해방 후 2년, 아직 사회가 어수선했던 시절. 태어나면서부터 너무 순하고 잘 울지 않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셋째 딸에게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듯이 몸가짐도 마음가짐도 한가지로 바르고 정갈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리라.
 지금까지 내 이름에 어울리는 생활을 해왔는가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찰스 램이 램(Lamb)이라는 자기 이름을 향해 “나의 행동이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나의 고운 이름이여”하고 기원했듯이 말이다.
 
 태어나 스물여섯 해 동안 사랑과 우의와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만 들었던 내 이름 석 자. 적어도 내 기억에 미움이나 노여움으로 내 이름이 불리었던 적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희’라는 이름에는 부모님의 기도가 실리고, 언니들과 오빠의 사랑이 담기고, 선생님들의 격려가, 그리고 친구들의 성원이 실렸을 것이다. 만일 내가 이름이 없는 아이었어도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름으로 하여 내 존재가치가 분명해진 건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1,2연
 
 학창시절 애송했던 이 시구와 함께 이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가녀린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장미꽃이나 패랭이꽃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오듯이, 나 역시 ‘정희’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단순하고 무의미한 생명체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됨과 동시에 존재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된 게 아닐까. 그러니 이름이야말로 최초로 나를 ‘나’이게 하는 존재의 집이 된 게 아닐까.
 
 시집을 가면서부터 내 이름은 그 사용빈도가 줄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어지간히 줄이고 근신하던 나에게 새로운 호칭들이 줄을 이었다. 당신, 새아기, 형수, 형님, 동서, 올케라는 진짜 보통명사들이. 아이를 낳고부터는 그런 호칭에 더해 ‘큰엄마’로 한 단계 승격되었고 남들로부터는 현정이 엄마 정훈이 엄마로 널리 불리었다. 그렇게 내 고유의 이름을 묻어둔 채 한 집안의 며느리로,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서만 지내던 시절이 어쩌면 결혼한 여자로서는 가장 무난하고 행복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묻혔던 내 이름이 다시 슬슬 고개를 쳐들고 고유명사로 당당히 대접 받게 되는 때가 왔으니. 모든 것을 현금 처리하던 시절이 가고 카드시대가 도래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 가정의 소비 주체인 나의 이름은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카드의 사용량에 따라 그들이 평가하는 나의 위상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에 대한 그들의 대접 역시 그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이즈음도 하루 여러 차례의 친절한 전화와 휴대폰 문자에 시달린다. “이정희 님이시죠?” “누구신데요?” 전화번호도 목소리도 낯설어 시큰둥하게 반응하면, “부자 되고 싶지 않으세요?” 혹은 “평창 부근에 금싸라기 땅이 나왔는데요” 등등 전혀 바라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엉뚱한 말로 나를 유혹한다. 귀찮고 짜증날 때가 많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그런 전화라도 걸려오는 내 이름이 대견하다 싶다.
 느지막이 수필가로 이름이 올랐다. 문인협회에 등록하려니 이미 같은 이름의 수필가가 두 분이나 있었다. 이를 어쩌나? 결국 차별화를 위해 아껴두었던 ‘학정(鶴汀)’이라는 아호를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문명을 크게 떨치지도 못한 처지에 남들처럼 평이하게 이름 석 자만을 쓰지 않으니,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나를 겉멋이 든 사람으로 오해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호는 이미 고인이 된 수필가 허세욱 선생님이 문하에서 중국문학을 배우던 때에 지어주신 것이다. 물가의 학처럼 청초하고 고아한 글쓰기를 주문하신 것이라 믿어 늘 마음에 새기고 있으나 닿을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러고보니 실명인 정희도 아호인 학정도 이름 그 자체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 버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랴. 60여년을 동고동락해온 것을. 다만 경계하고 근신하여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되찾은 내 이름 앞으로 우편함은 늘 가득 찬다.
 
                                                                                                  <<수필문학>>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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