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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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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석이와 현무    
글쓴이 : 김혜자    13-06-25 19:20    조회 : 5,768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새로 개막한 특별전의 해설 준비를 하던 어느 주말이었다. 아들네 세 식구가 놀러왔다. 아들내외는 모임에 나가고 손자 민석이와 둘이 있게 되었다. 내가 맡은 특별전, <고구려 고분벽화>의 첫 안내시간이 임박해 마무리 작업 중이던 나는 손자가 반가우면서도 아이와 편안하게 놀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전시물을 등지고 서서 관람객과 눈을 맞춰가며 진행하는 박물관의 해설 안내는 자신이 없으면 말이 엉키고 두서없이 얼버무리게 되기 십상이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보면 첫 안내 전날 밤은 꼴딱 새우기도 한다. 아들네와 같이 살 땐 말하지 않아도 아들 며느리는 그날이 닥친 걸 눈치 챘다. 늦은 밤까지 열심인 내 모습을 바라보다 아들은 딱하다는 듯 씩 웃곤 했다. 내 몸이 상할까 걱정이라는 말과 달리 얼굴은 자원봉사로 하는 일인데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건 뭐냐는 표정이었다.
8년 전 처음 도슨트가 되었을 땐 훨씬 더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충분히 공부하고도 자신이 없었다. 동생이나 언니, 친구들을 불러 맛있는 점심을 진상해가며 그들에게 미리 시연을 하고,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고서야 안심하고 관람객 앞에 설 수 있었다.
아이와 내가 공생할 묘안을 궁리하다 거실에 한글 낱말 카드를 좍 뿌려놓고, 방바닥 한편에는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 녀석이 특별히 좋아하는 고래 그림을 늘어놓았다. 한동안 그것들을 헤치며 돌아다니던 아이는 여러 종류의 고래 그림들 앞에 앉았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내 방에서 각종 전시회 도록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녀석이다. 꼬맹이는 이미 반구대 절벽에 새겨놓은 선사시대의 암각화 중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귀신고래와 머리가 큰 향고래를 구별할 정도로 그 그림에 익숙하다.
한참을 혼자 놀던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살피는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마침 모니터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 하나인 강서대묘의 북벽에 그려진 현무(玄武)가 떠있었다. 그 그림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던 아이는 계속 보겠다며 화면을 바꾸지 못하게 했다. 그러더니 그걸 프린트해 달란다. 녀석의 주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한 장은 현무 모습을 A4용지로 가득 차게, 또 한 장은 그 1/4정도로 뽑아 달라는 것이다. 두 장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한 장은 다음 날 어린이집의 선생님께 갖다드리고, 또 한 장은 친구들에게 보여 주겠단다. 요구대로 해주었다. 녀석은 그걸 품에 꼭 안고 몹시 흐뭇해했다.
생판 모르는 관람객에게도 성의를 다하고도 더 자세히 해설을 못해줘서 안달이 나는 나다. 기회는 이때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순간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줘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거 4살 어린 것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면서도 내 극성맞은 도슨트 근성이 어디로 갈까. 어느새 무릎 위의 꼬맹이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이가 관심을 갖고 눈을 떼지 못하는 현무는 음을 뜻하는 거북과 양을 뜻하는 뱀이 서로 합체된 모습이다. 마주보는 자세로 비스듬히 허공을 바라보는 거북과 뱀의 아가리에서 신비한 기운이 화염처럼 뿜어져 나오고, 거북이 자아내는 운동감과 뱀이 이루어낸 탄력성이 잘 어우러져 실재하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사방신(四方神) 중의 하나로 북쪽을 지키는 신인 현무는 무덤주인이 극락왕생할 때까지 해로운 기운으로부터 수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6~7세기 동아시아 회화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 그 그림은 2004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의 하나다.
아들내외가 돌아왔다. 그들이 현관에 들어서서 미처 신발도 벗기 전이었다. 쏜살같이 달려 나간 아이는 제 엄마 아빠 코 밑으로 현무의 그림을 들이밀며 조금 전 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거북이느은 여자고요오. 뱀으은 남자예에요. 그런데요오 이 현무는요오 무덤에서 남쪽을 지키는 신이예요. 그리고요오 나쁜 사람이 들어오면요오 뱀이 꼬리로 때려줘요."
어리둥절한 아들내외는 대충 응해주고 있다. 남쪽이란 말은 나는 물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이라고 잘못 말한 것은 이미 이 네 살배기가 동서남북 방향에 대해서 뭔가 감을 잡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뱀이 꼬리로 때려준다는 것도 무덤 주인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표현한 것이리라. 그러면 그렇지. 박물관 도슨트의 손자답지 아니한가. 아들내외에게 신통방통 기특한 내 손자자랑을 한참 했다.
“엄마, 또래 다른 아이들도 그 정도는 다 한다고요.”
잠자코 듣고 있던 아들이 찬물을 쫙 끼얹었다.
경복궁을 안내하는 날이었다. 유치원생이 된 녀석이 주말에 놀러와 나를 따라가겠다며 앞장을 섰다. 아무래도 내 해설을 들으며 일반관람객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아이 힘에 부칠 것 같아 망설이는데 마침 아들이 같이 가겠다며 나섰다. 걷다가 제 아빠 목마도 타며 두어 시간이나 걸리는 코스를 잘도 따라왔다. 녀석은 그렇게 해설을 들으며 자연사박물관, 나비박물관,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등 꽤 여러 곳의 박물관을 관람했다.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는 돌동물 조각상들이 설치되어있다. 하월대 난간에는 십이지신이, 상월대 난간 위에는 사방신이 자리 잡고 있다. 상월대 북쪽 계단 양 옆에 있는 현무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녀석이 소리를 쳤다.
“고구려 현무와 틀려.”
“뭐가 틀린데?”
“뱀 꼬리가 없어.”
2년 전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본 강서대묘의 멋진 꼬리를 가진 신비한 모습을 한 현무를 기억해낸 것이다.
얼마 후 며느리로부터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이야기 중에 녀석 때문에 당황했던 얘기를 했다. 글쎄 유치원 다니는 민석이가 가속도에서 스피드와 파워 중에서 뭐가 더 중요하냐고 갑자기 묻더라는 거다. 가끔 아이답지 않은 제법 어려운 용어와 질문을 퍼부어서 제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 뭐든 처음 듣는 말이나 모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아이. 제 스스로 자신이 창의성이 있다고 평가하던 당돌한 꼬맹이가 어느새 훌쩍 커서 올 9월에 5학년이 되었다.
 
지난 여름방학에 미국 몬태나의 자연사박물관을 다녀온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박물관에서 본 공룡에 대하여 종류별로 그 특징들을 신이 나서 한참을 들려주었다. 문득 경복궁에 있는 돌동물 현무와 고구려 옛 무덤 속에 그려진 현무의 차이를 예리하게 짚어내던 유치원 꼬맹이였던 민석이 모습이 떠올랐다. 몇 년 전부터 녀석은 공룡에 빠져있다. 저러다간 나중에 공룡박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현무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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