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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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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바람 바람    
글쓴이 : 이정희    13-07-08 16:26    조회 : 4,707
바람· 바람· 바람
학정 이정희
 
 
 1.바람(風)
 
 바람은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나는 바람을 좋아했다.
 죽은 나무를 부활시켜 연두색 이파리를 피워내고 남녘의 꽃 편지를 실어 나르던 잔풀나기의 살바람이 좋았고, 여름날 땀 흘리며 오른 산정(山頂)에서 맞는 한 줄기 산바람이 좋았다. 우수수 오색 나뭇잎을 떨구는 갈바람이 처연하면서도 좋았고 냉기가 귓불을 때리는 겨울의 삭풍까지도 싫지 않았다. 특히 눈 덮인 겨울 산을 오르다가 침엽수들이 빽빽한 속에서 듣던, 웅웅거리며 달아나던 태고의 바람소리를 사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적 읍내 집에서 시오리 떨어진 농가 뒤울안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언니 동생과 함께 그곳으로 놀러 가면 댓잎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부딪치면서 수런거리고 사각거리며 솨아 솨아 소리를 냈다. 그 신비스러운 음향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넌 아니? 바람을 좋아하는 건 고독하다는 증거야.”
 대학시절 가까이 지내던 남자친구는 말했다. 고독은 사랑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그랬을까. 그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무채색은 아니었지만 나는 여전히 머물지 않는 바람을 더 좋아했다. “바람은 정지해 있으면 이미 바람이 아니다”라고 읊은 작가가 누구였더라.
 
2. 바람(誘)
 
 근신하며 살아오던 내가 늘그막에 바람이 날 줄이야.
 늦깎이로 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때까지 비교적 평범하게 문화의 소비자로 문학의 향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차례로 학업을 위해 외국으로 떠난 후 이웃집의 부산한 새벽 불빛이 오히려 정답고 부럽게 느껴지던 그때, 자식들에게 향하던 내 시선과 관심이 내면의 나에게로 꽂히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더러 잘한 일도 없지 않았으련만 유독 잘못 했던 일과 어리석었던 일, 허망하게 흘려버린 시간에만 마음이 묶이면서 자책과 후회로 보내던 나날이었다. 그때 내게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허전하고 서러운 심정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기에 글쓰기의 첫 행보는 나 자신의 내면을 향한,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젊은 날 좋아하던 스쳐 지나가는 그런 바람이 아니었다. 조금씩 내 속의 응어리를 토해내면서 지난 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후에도 더 세차게 나를 휘감은 바람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의 고백을 넘어 우리 삶의 진실을 찾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점차로 ‘글쓰기’라는 화두가 내 생활의 전반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정황을 살피고 그 의미를 탐색하며,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의 고통으로부터도 보편적인 삶의 어떤 비의를 찾아 한 가닥 글의 실마리를 끌어내고 싶었다. 생각만큼 그 일은 쉽지 않았다.
 글을 읽고 보는 눈은 차츰 트이는 것 같은데 쓰는 능력은 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 간극으로 하여 나는 때로 우울하다. 그런데도 떨치지 못하고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어찌 바람이 났다 아니하랴.
 
3.바람(願)
 
 글이란 읽을 줄 아는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허지만 어찌 모든 글이 다 바라는 바가 같겠는가. 희로애락 감정의 배설을 위한 글도 있을 것이요, 쓰는 일이 즐거워서 놀이 삼아 쓰는 글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나온 역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글도 있고 누군가를 위무하고 격려하고 싶어 쓰는 글도 있으며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대를 얻기 위해 쓰는 글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쌍방으로 소통이 가능한 글, 필자인 나와 독자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글, 그리하여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종국엔 감동이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단 한 편의 글이라도 내 마음에 흡족하면서 동시에 독자도 만족시키는 글을 써봤으면 좋겠다.
 그동안 내 신상명세를 시시콜콜 다 드러냈다고 할 순 없으나 꾸미지 않은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한 편 두 편 문예지에 작품이 실리면서 차츰 나의 소출에 대해 애정이 가고, 이미 발표한 글도 자식처럼 아끼며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다. 자식의 못난 구석을 떠올리면 속이 짠하듯이 흡족하지 못한 글을 발표해놓고 부끄러움으로 바장이며 불면의 밤을 보낸 적도 없지 않았다.
 ‘한 10년쯤 되면 제목만 주어져도 무엇이든 술술 써지겠지.’ 하고 나는 기대했다. 그동안 나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가. 아, 곧 그 10년이 다되어가는데도 나는 지금 소망과는 먼 거리에 있다.
 
 이젠 정말 맛 좋은 요리 한 접시 내놓고 싶다.
 작품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이나 일상의 사건의 의미는 그것 자체에 내재된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가의 인식의 결과일 터. 나아가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진실과 연관시킬 때만이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감성적 지성적 용량의 문제다.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써서 안목과 통찰력을 키우고 의식의 지평을 넓혀가야 하리라.
 꼭 알맞은 그릇에 담긴 음식이 더 맛이 나듯 선명한 주제를 어울리는 형식으로 담아내고 싶다.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글, 재미가 있는 글, 무릇 읽기 쉬우면서도 읽고 난 후 잔영이 있는 글, 적어도 한번쯤 되풀이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인 호모나랜스들을 이야기마당으로 이끌어내고 싶은데... .
 
                                                                                                   <<계간수필>>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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