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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두마 안어보세    
글쓴이 : 김현정    13-09-15 22:29    조회 : 4,626
보두마 안어보세
김현정
 
그것은 순전히 목각인형 탓이었다. 평소 같으면 여드레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라며 하고 돌아섰을 내가, 낯선 남자의 수작에 잠시 흔들렸던 것은 말이다.
몇 년 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여행할 때의 일이었다. 남편이 카타니아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는 날이라 나는 혼자 관광에 나섰다. 시칠리아 섬 동쪽, 코발트빛의 이오니아해를 내려다보며 굽이굽이 언덕길을 휘돌아 올라가자 타우로산 꼭대기에 숨 막히게 아름다운 휴양지 타오르미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버스를 빼곡히 채웠던 여러 인종의 관광객들이 튕겨지듯 일시에 쏟아져 나온 거리에서 나는 한동안 우두망찰 서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생판 모르는 군중 속에 혼자라는 자유로움이 뭉클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려 애쓰던 평소의 메뚜기 일정을 속으로 비웃으며 오늘 만큼은 마음껏 게으른 관광을 하리라 작정하였다.
한가로운 마음으로 움베르토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나는 어느 상점 앞에서 그만 발을 멈춰 서고 말았다. 쇼 윈도우 구석에 진열된 한 조각품에 눈길이 머물자 하고 가슴을 치는 인간 본연의 고뇌가 나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커진 자신의 성기를 속수무책으로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고뇌하는 신부의 모습이었다. 유난히 마른 몸에 오직 그 부분만이 기형적으로 강조된 목각인형이었는데 여느 성인용품처럼 음란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자신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일그러진 표정과 고통스런 자세 때문이었다. 처치 곤란한 원초적 본능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적 고뇌가 절절히 풍겨나는 조각품이었다.
좀 전에 수도원을 보고 나온 이후라서 그랬을까? 산꼭대기 외딴 마을에서 수만 가지 갈등을 가슴에 품고 수행하던 수도자의 비애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중세시대 성직자들에게는 인생이 끝없는 금욕의 연속이라 했다던데, 욕망과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육체는 영혼의 성스러움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수도사 출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육체는 영혼의 불쾌한 옷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그 순간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남자에게 최대의 비극은 침실의 비극이라고 고리키에게 털어놓았던 톨스토이. 그에게 있어 침실의 비극이란 아내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비극이 아니라 80이 넘도록 수그러들 줄 모르고 샘솟는 성욕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육욕을 다스릴 길 없어 가당치 않은 신분의 여성들을 기웃거려야 했고 그로 인한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대문호 톨스토이의 아픈 고뇌가 이 목각인형에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쾌락과 함께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할 인간 모두의 근원적 짐이라는 걸 그 작은 조각품 앞에서 새삼 곱씹으며 서 있었다.
한껏 게으른 템포의 오전 관광을 마치고 햇살 잘 드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투박한 호밀 빵에 말린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간 시칠리아식 샌드위치를 시켜 느긋하게 점심을 즐겼다. 동양여자 혼자서 너무 오래 머무른 게 표적이 되었을까?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골상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량종은 이태리 남성이라고 했던가? 교언영색으로 수인사를 끝낸 그는 내게 자기 방을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탁 트인 창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아래로는 영화 <그랑 블루>의 촬영지 이졸라 벨라(Isola Bella) 섬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라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이 건물 위층이니 바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참으로 노골적인 수작이었다. 방 열쇠를 짤랑짤랑 흔들며 잠깐이면 된다고 조르는 폼이 어지간히 급하고 애간장이 타는듯했으나 매너만큼은 아직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시골 어른들께 주워들었던 거문도 희롱요가 떠올라 쿡쿡 속웃음이 났다.
 
물속의 새우는 고기 간장 녹이고
약장사 처녀는 총각 간장 녹인다
저기 가는 저 처녀 엎우러나 지라
일세나 준댁개 보두마나 보세
저기 가는 저 총각 모자나 벗어지라
주서나 준댁개 악수 한 번 해보세 (거문도 민요-<보두마 안어보세>)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있어 나는 뭐란 말인가? 눈앞에서 알짱알짱 물고기 애간장 녹이는 작은 새우요, 어여쁘게 치장하고 총각 간장 녹이는 장터의 약 파는 처녀였던 것이다. 카메라 매고 손에 지도 들고 영락없는 관광객 차림으로 혼자 어슬렁거리는 꼴이 손만 뻗으면 요리해볼 수 있는 호락호락한 사냥감이었다. '길가다 엎우러진(넘어진) 처녀'를 때마침 만났으니 '일세나 준댁개(일으켜 주는 척) 슬쩍 한 번 보두마보자(안아보자)'는 유들유들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가만 보니 사내는 어딘지 고단해 보였다. 이탈리아에서 발전이 뒤졌다는 남부, 그 중에도 외떨어진 최남단의 섬 시칠리아의 산꼭대기 마을 주민답게 그의 모습에는 버거운 삶의 피곤이 묻어 있었다. 이런 사냥을 하기에는 후줄근한 차림새와 서툰 외국어가 그랬고, 순진해 보이는 촌사람의 표정 또한 그랬다. 길거리에서 욕정의 먹잇감을 찾는 일 못지않게 생계의 먹잇감을 찾는 일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가 두렵거나 밉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누구 하나 삶과 사랑에 고단치 않은 인생이 있을까?
쌩하니 찬바람 일으키며 돌아서서 가버리기엔 어수룩한 이태리 촌사내의 고단한 사랑이 왠지 안쓰럽고 가여웠다. 바로 그 목각인형 때문이었다. 여자에게 거는 수작은 제법 걸쭉했으나 흔들리는 그의 눈빛 속에선 나약한 피조물의 비애가 어리비쳤다.
고뇌에 찬 톨스토이가 그 안에 있었고 이혼 후 타국에서 고독하게 사는 내 친구가 어른거렸고, 삶의 풍파와 힘겹게 맞서다 요절해버린 내 오빠가 떠올랐다. 아니 불완전한 인간, 나 자신의 모습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머릿속에 엉키는 생각들이 나를 잠깐 흔들리게 했던가? 그의 손끝에서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는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엄숙한 이성과 갈급한 이태리 사내의 흐트러진 본능이 부딪히는 마찰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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