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나고야(名古屋)에 다녀왔다. 올해 들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는 아내가 동행했던 짧은 관광이었고 이번엔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모시고 간 나들이였다. 평소 일본에 대한 향수를 달래시던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기회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셨다. 전라북도 무주(撫州)가 고향인 외조부께서 전 가족을 이끌고 후쿠오카로 이주, 정착해 있었던 터라 어머니는 타국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일본 전통문화와 풍습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여학교까지 마치는 동안 어머니에게 ‘한국’이라는 개념은 거의 깃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그토록 꿈꾸어 오던 조국해방의 가슴 벅찬 소식이 밀물처럼 밀려들자 외조부는 가족 중 몇몇을 이끌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 비극의 와중에 어머니는, 친척이 정착해 살던 울산으로 잠시 다니러 오게 된다. 그리고 울산과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던지 누군가가 중매를 섰다. 어머니가 조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 뒤로 6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말 발음도 꽤 익숙해졌고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하신 어머니였다. 그러나,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는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후쿠오카의 추억이 항상 짙게 자리매김해 있었던 모양이다.
때마침 광복절이 임박해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여부가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나고야 중부공항 입국장을 들어서는 어머니와 나는 묘한 감정을 서로 억누르고 있었다. 고향과 타국의 두 가지 느낌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나들이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3개월 체류 예정으로 동행하신 어머니를 무사히 모셔다 드리고 나는 그 이튿날 다시 귀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타국이지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고향이 있는 일본 땅을 밟을 때마다 전해오는 묘한 감정은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회사 업무에 복귀해 새로 주어진 일감이 공교롭게도 민예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쓴 ‘조선의 예술’ 번역본을 최종 교열하는 작업이었다. 일본과의 이런저런 인연을 떠올리며 교열 작업에 몰두한 지 반나절 쯤 지났을까. 평소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내 얕은 지식의 바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의 미(美)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여러 글들을 접하며 서서히 감흥(感興)에 젖기 시작했다.
1889년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야나기는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1916년 8월에 조선을 처음 여행하게 되는데, 이 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방문했다. 종교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이 석조상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동양종교가 낳은 조형미의 우수성에 감명을 받고, 조선민족의 예술적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그 뒤 때때로 조선을 방문, 조선 미술공예품에서 보이는 동양정신을 이해하고, 그의 직관을 통해 발견되는 서양과의 합일점을 언어와 작품으로 표현하려 했다. 특히 일제에 의한 광화문 철거 당시 국내외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강력하게 반대, 타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표한 사람으로도 평가받았다.
특히 1919년 물밀듯 일어난 3·1운동의 뜨거운 함성을 피부로 느끼며 그가 밝힌 ‘조선에 대한 심정’을 읽노라면 마음 한 편에서 뭉클함이 솟기도 한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고, 조선인 못지않게 조선의 미(美)를 사랑한 그가 3·1운동 직후에 요미우리 신문에 게재한 글 가운데 한 부분을 소개해 본다.
‘남의 나라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길은 과학과 정치적인 지식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내면적인 이해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애정에 근거한 이해가 그 나라의 내부를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일본이 많은 돈과 군대와 정치가를 그 나라에 보냈지만 언제 마음의 사랑을 보낸 적이 있는가.… 조선인들이여, 우리나라의 식자(識者) 모두가 그대들을 매도하고 괴롭히는 일이 있어도 그들 중에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일본이 올바른 인도를 밟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반성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