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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프라이팬 닦는 법    
글쓴이 : 박재연    14-02-07 07:25    조회 : 5,048
   사양(仕樣)’이 맘에 든다며 1번 타자로 수업을 맡기겠노라 약속했던 노인대학은 개강이 다가오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중 초청을 받았다는 동료 강사가 생겨나자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역시 나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사양이었기에 의문은 커져갔다. 이유야 있겠지만 그래도 양해는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요즘엔 신입사원 면접엘 응해도 정중한 감사인사는 물론 교통비까지 지급하는데 말이다.    더구나 그쪽에서 먼저 호들갑을 떨었으니 완전 어이 상실이다.
   부아가 돋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전화로 물어볼까, 메일을 보낼까, 아님 그냥 지나갈까? 그냥 지나가자니 의문의 미스터리가 두더지 게임마냥 언제 어디서 불쑥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 한 동료가 참석할 미팅에 노인대학의 담당도 온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상황을 봐서 슬쩍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초면이 될 두 사람에게 대답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리 해도 내 강좌를 개설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면서 연락이 늦어 미안하고 가을학기에는 꼭 초청하겠노라며 거듭 사과를 하는 것이다. 통화가 끝난 후 안도감이 밀려왔다. 참길 잘했다. 그것도 모르고 성급히 행동했다면 내 이미지만 구겼을지도 모른다. 동료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이 건조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없이 퍼 날라지는 카톡 메시지의 홍수에 익사할 지경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물에 빠진사람을 구조하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에 돌멩이만 매달 뿐이다. 살짝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대충 스캔하는데 웬일로 눈에 번쩍 띄는 문구가 있다.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찌꺼기는 철수세미로 문지르지 말고 물에 담가두라는 혜민 스님의 설거지 요령(?)이다. 스님께서 주방 일을 언급하시다니 무슨 일일까? 죄송하지만 그 일로 따지자면 내가 훨씬 선배일 텐데 말이다.
   더구나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매일 프라이팬을 닦는 중이다. 식성도 별난 딸() 때문인데 그 애는 입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한 가지 음식만을 집중공략 하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최근에는 밥에 김치와 고추장, 치즈며 각종 소스로 범벅을 만들어 볶은 후 눌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몸을 혹사당한 프라이팬은 늘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그 몸을 씻길 때마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나만의 독백을 늘어놓곤 했는데 스님의 어록을 다시 읽어보니 이제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투덜거릴 때에도 그 심오한 진리와 지혜는 싱크대 설거지통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문제에 정면 돌파하여 이마에 혹만 남기기보다는 조용히 시간에 맡겨 두라는 말씀 아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변하든 내가 변하든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이다.
 
   지구촌 리포트의 특파원을 지냈던 김상운 기자는 <왓칭(watching)>이라는 책을 통해 우주의 에너지를 설명하면서, 지켜보는 냄비의 물은 실제로 늦게 끓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초조함과 안절부절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디 물 뿐이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마크 트웨인은 2년간 처박아둔 원고를 다시 꺼내 읽어보던 중, 말랐던 잉크가 어느새 저절로 차오르는 엄청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나이를 먹어가는 게 좋은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내 성급한 성질머리도 프라이팬과 함께 푸욱 담그기다!
 
      <<문학사계>>  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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