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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더더기 없이 꼭 맞는 절집 크기의 대련사    
글쓴이 : 강희진    12-05-04 15:03    조회 : 4,228
 
 -우리 문화유산 한 발 더 다가가기. 예산-

군더더기 없이 꼭 맞는 절집 크기의 대련사

 비운의 기운이 서려 있는 절집, 대련사는 예산 임존성 남문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다. 동산리 마을 입구에서 ‘대련사’라는 돌 이정표를 놓치고 올라오면 끝내 일주문이 없어 절집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마을 입구에서 냇가를 따라 낸 마을길을 따라 올라오다 산과 물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곳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그 산길의 끝에 봉수산 대련사가 있다. 
  마치 위기의 왕국처럼 절벽과 계곡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천 년을 버틴 고목에 지탱하고 간신히 놓여 있다. 부처님에 대한 공력이 아니고는 어찌 버티랴. 그 고목만이 절터의 궁벽함을 이기고 있다.
  산 아래 펼쳐진 예당호의 경승이 아름답지만 위태롭고, 고즈넉하지만 다만 인가가 멀어 조용할 뿐이다. 터로는 적당하지 않지만 수기가 충만하여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수도처이다.
  본래 이 절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시대라지만 전하는 바 없다. 그러나 백제 패망 이후 부흥군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위하던 원찰로 쓰였음은 짐작이 간다.
  처음 산을 연 곳은 지금의 대련사 능선 너머 임진란 장군 박홍의 묘지 부근에 있었으나 왜 이리로 언제 왔는지 그 연유는 모른다. 그곳에 당시 법당의 규모만 짐작하게 하는 커다란 연화문 주춧돌만 남긴 채 다만 이름만 그대로 옮겨와 법당 위에 얹혀있을 뿐이다.
  본전인 극락전은 인색한 지주가 억지로 땅을 내준 듯한 뼘 땅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집의 아담한 맞배지붕이 부처님 한 분 모시기에는 꼭 맞는 크기다. 남길 공간도 없고, 남는 공간도 필요치 않은 곳이다. 기단도 군더더기 없는 크기다. 다만 여느 절집과는 다르게 자연석으로 기단을 해 당시 살림을 짐작게 한다. 당시 날마다 품을 팔아 품삯을 모으고, 탁발을 통해서 불전을 모아 대들보를 올린 중창자 보월당(普月堂)선사의 알뜰한 공력이 보이는 부분이다.
  대련사 중수 상량문에 그의 공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바람에 마모되고 비에 씻겨 전각과 당우가 기울어지고 불상을 봉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스님들이 흩어지고 도량은 공허하였다. 이에 보월당만이 홀로 남아 눈물로 도량을 세우기를 결심하고 권선과 구재(鳩財)를 마을마다 다녔다. 민간에 지성으로 도움을 구하고 품대와 날마다 탁발을 나가고 좌우로 청탁하였다. 비로소 도광(道光) 29년 기유년(1849년) 봄에 일을 마치다  ”
 이곳에는 또 하나의 고귀한 비루함이 남아 있으니 바로 삼 층, 아니 사 층 석탑이다.
 온전한 삼 층은 려말 선초 즈음의 형식미를 가진 탑이다. 일 층을 제외한 탑신이 급격하게 준다든지, 옥개석의 처마 곡선이 매우 급하여 반전이 없는 비록 삼 층 탑이지만 상승감이 매우 좋다. 그러나 고려 탑의 화려함보다는 촌스런 소박함이 더욱 질박한 맛이 난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언뜻 보덕사 석탑의 분위기가 난다.  바람에 갈리고 빗물에 씻겨나가는 세월에 모든 전각이 쇠락했지만 이 석탑만이 남아 보월당의 법력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석탑이 삼 층인데 분명 지금은 사 층 탑이다. 삼층 자리에 단지 다른 옥개석 하나만이 들어와 있다. 아마 무너진 탑 속에서 어딘가 남아있던 옥개석을 찾아 끼워 넣은 듯하다. 그러나 끼워 넣은 마음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다. 그럴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었으리라. 기록상 최초 중수 해인 1468년쯤에 애써 사 층으로 각색된(?) 석탑일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만들어진 탑은 둘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도 계룡산처럼 남매 탑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보물 감추듯이 이 층과 사 층 사이에  끼워 넣은 이 옥개석 하나만으로 고려 시대 백제탑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이곳이 백제 부흥 의병들의 극락왕생을 빌던 곳이어서일까. 
 대련사를 비련사(悲戀寺)다. 바로 백제와 맞대고 있어서이다.
 대련사가 산을 연(開山) 봉수산 임존성에는 커다란 연당(蓮塘)과 연정(蓮亭)이 있었다 하나 대련사의 이름에서 그것을 기억할 뿐이다. 이 연정은 또 복신, 지수신 등 백제 장수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와 슬픔을 안고 있었을까. 전쟁에 지쳐 잠시 심신의 피로를 풀던 곳도 이 연정일 것이고, 마지막 장수 지수신이 통한의 패배를 맞이하여 마지막 피를 뿌리고 간 곳도 이 연당이었으리라. 오직 연꽃만이 그들의 뜻을 품고 연당을 채웠을 것이 짐작이 간다. 그 슬픔과 이름을 함께 절집으로 가져와 떠도는 백제 영혼을 위로하던 절집이 바로 대련사다. 
그러나 대련사는 절집 이름을 임존성에서 따옴으로써 망국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초개같이 던져버린 임존성의 3만 의병의 한(恨)을 다스림을 스스로 밝히고 그 비운의 시기를 홀로 맞이해야 했다. 
 백제 패망 이후 대흥지역의 두 분위기, 친 백제계와 친 신라계와의 갈등이 속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친 신라계가 행정력을 장악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백제계가 주도하였다.  주로 백제계는 봉수산을 중심으로 공마당 놀이와 묘순이 바위의 풍자극을 통해 이승에서의 한풀이를 했고, 대련사에서의 극락왕생 기원으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 분위기는 후백제를 지나 고려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백제계의 분위기에 놀란 신라계들이 오죽했으면 지수신에게도 쩔쩔매던 패장 소정방을 끌어와 사당에 앉히고 성황신으로 모시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렸을까.
 비로소 조선이 열렸으나 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살아남기에는 양반들의 원찰이 제일 쉬웠다. 차라리 화려한 고려 불교와 함께했고 봉수산 백제의 기운을 누르는 비보 사찰로 쓰였더라면 화려한 단청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고, 조선 사대부가의 원찰과 함께 했으면 그 면면함을 지켜는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련사는 조선 시대임에도 누구의 원찰도 아닌 채 쓰러졌다가 일어서길 500년을 버텨왔다. 조선에서도 망국의 부흥은 그다지 마땅하지는 않았으리라. 그 성쇠가 만만치 않다.
  1468년 중수를 시작으로 1691년 다시 중수했으나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오직 탑만이 버티고 법력(法曆)을 지켜왔다. 그 후 다시 1745년 다시 중수하고 없어지길 반복하더니 1849년 보월당이 이를 슬프게 여겨 홀로 품을 팔고 탁발을 하여 오직 민간의 힘을 얻어 노전, 선방, 법당을 차례로 완성하여 지금의 대련사를 있게 했다.
 오직 조선 500년 동안 새롭지 않은 것은 탑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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