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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노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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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삼관과 나    
글쓴이 : 노정애    12-05-16 20:02    조회 : 6,152
 
                                                    허삼관과 나
                                                                                              노문정(본명:노 정 애)


  그해 8월의 막바지는 더위가 고래심줄처럼 질기게 물고 늘어져 아스팔트라도 녹일 듯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내 속에서는 목 밑까지 무언가가 자꾸 차올라 답답함이 숨통을 조여 오는듯했다.  시원한 곳에서 책이라도 보면 나아질까하는 바람을 안고 광화문의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정작 내가 간 곳은 서점과 코를 마주하고 있는 헌혈의 집이었다.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조금 덜어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그곳은 피서지도 아닌데 20대의 젊은 남녀가 가득차 있었다. 안내를 맡은 사람에게 이 나이에도 헌혈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서 허삼관을 떠올렸다.
   그는 치과의사였던 중국의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주인공이다. 살기 위해 피를 파는 그의 삶은 눈물겹다. 가족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식의 출세를 위해, 아픈 자식을 살리기 위해  한 움큼의 소금을 털어 넣고 열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매혈을 하는 장면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의 매혈은 이 시대로 오면서 건강으로, 자존심으로, 젊음으로, 꿈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리라. 소설의 막바지에 이제는 자식들도 다 장성해 자리를 잡고 그 또한 먹고 살만해졌을 때 자신을 위해 매혈을 하러간다.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쫓겨나자 그는 “이제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며 목 놓아 운다. 위기의 상황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매혈로 가족을 책임져온 그에게 “늙은 피는 필요 없다”는 말은 절망과도 같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절망감이 몰려오지 않을까하는 하는 걱정이 그를 떠올린 것이리라. 안내를 맡은 분이 16세에서 65세 미만으로 체중이 45Kg을 넘으면 된다며 앞으로 20년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럴 때는 지나치게 통통해서 구박만 당하던 몸도 쓸모가 있다. 설문지 작성을 했다. 약물복용 여부, 국내 말라리아지역을 간 적은 있는지? 최근 열대지역으로의 해외여행, 광우병이 발병했던 시기에 영국이나 유럽체류경험 여부등. 이곳을 통과해 혈액비중 농도 측정, 혈압, 체온측정까지 한 후 합격판정을 받고서야 헌혈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첫 헌혈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엄청난 양의 과제 내주기로 유명한 영어선생님의  숙제를 하지 못해 마포걸레자루에 맞을 각오를 하고 있을 때 헌혈차가 왔다. 헌혈을 하면 수업 시간은 빼 준다는 말에 매도 피하고 봉사도 하니 일석이조라며 채혈을 했다. 그날 헌혈 증서를 가족들 앞에 자랑스럽게 흔들었을 때 어머니는 “뜨신 밥 묵고 밸 짓을 다한다.”고 눈을 흘기셨지만 아버지는 “뜨신 밥 묵으니 마음도 따신 거지”라며 내 머리를 쓸어주셨다.
  그 다음해 헌혈차가 왔을 때 선생님은 희망자를 묻기도 전에 “지난  해 한 사람 나가” 라고 해서 2, 3학년 때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또 했냐며 포기하시는 눈빛이지만 아버지는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런 기억은 재미난 추억으로만 남겨둔 채 잊고 있었다.
   내 몸을 떠난 붉은 피가 제법 볼록한 형태로 모여지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한 달 전 어머니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사랑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셨던 아버지가 생각나서였다. 나는 장례를 치르며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했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사업 실패로 쓰려져 누워 지내셨던 8년은 참기 힘드셨을 것이라며 이제 훨훨 날아다니시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난 그 분을 더 많이 그리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착한 일을 해도 칭찬해줄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내게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으리라. 목 밑까지 차여있던 무엇은 아마도 슬픔일 것이다. 늘 그 자리에 계시리라 생각하다가 문득 현실을 직시할 때면 간절한 그리움이 남아 슬픔의 탑을 한 칸씩 목 밑까지 쌓아 올렸나보다.
  헌혈을 하면 혹시 이 슬픔을 덜 수 있을까? 뜨거운 피를 400ml쯤 내 보내고 나면 조금은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내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의 칭찬이 간절히 그리워졌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가장 노릇한다고 매혈을 하는 허삼관 보다 내 슬픔을 덜겠다고 채혈을 한 나는 더 형편없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내 피를 수혈 받은 자가 슬픔도 함께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수혈 받은 자의 절박함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반성문을 쓰듯 그 뒤 매년 한 번씩 건강하고 기분 좋은 날을 택해 행복하게 헌혈을 한다.
  
 얼마 전 헌혈을 했다. 올해로 4번째다. 집안의 잔걱정거리가 있어 미뤄두고 있던 차에 신종플루 확산으로 헌혈자가 줄었다며 헌혈을 부탁하는 문자메시지가 여러 차례 들어와 행복지수가 한껏 부풀어 올랐을 때 하게 되었다.
  피는 생명이고 의욕이며 꿈과 희망이다. 내 피를 받은 누군가가 삶의 의욕을 찾고 꿈을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가진 행복 바이러스도 제곱으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나이든 피가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 나의 헌혈은 계속 될 것이다. 허삼관의 절망은 잠시 잊어도 좋으리라. 날 칭찬하시는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을 바람 속에서 느끼기 때문에 헌혈을 하고 나오는 발걸음은 늘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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