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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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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그몽    
글쓴이 : 김혜자    12-05-18 09:50    조회 : 4,703

담장 밖까지 뻗은 앵두나무 가지마다 시샘하듯 앞 다퉈 핀 꽃이 한창이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다섯 살짜리 손자 민석이와 동네슈퍼 가는 샛길이 온통 꽃으로 화사해졌다. 연분홍 꽃길 따라 앞장 선 녀석의 발걸음도 의기양양하다.

아이는 지난해부터 작은 동물인형인 에그몽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꼭 쥔 채로 잠들만큼 애지중지한다. 조금 전부터 계속 제 아빠 눈치를 보며 슈퍼에 가고 싶어 애교스런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TV 코미디 프로에 푹 빠져 시끌벅적한 틈을 타 둘이서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온 참이다. 녀석은 할머니가 으레 그걸 사 줄 걸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에그몽은 5-6cm정도 크기의 귀여운 조립식장난감이다. 그네를 타는 곰, 북을 치는 토끼, 귀여운 새, 익살맞은 강아지 등 대여섯 종류의 동물이 달걀모양 초콜릿 속에 들어있다. 동네 슈퍼의 계산대 가까이 꼬마둥이들 눈에 잘 띄는 바닥에는 어김없이 20개들이 에그몽 상자가 자리 잡고 있다. 민석이는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한다. 그러나 포장된 상태로는 도무지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쪼그리고 앉은 꼬맹이는 에그몽을 하나씩 꺼내어 앞뒤를 살피고 흔들어도 보며 세세히 관찰한다. 제 나름대로 선별법이 있는지 이거다 싶은 걸 찾을 때까지 진지한 탐색을 계속한다. 순식간에 여남은 개가 주위에 널린다. 기껏해야 한두 개 살터인데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게주인 보기가 민망해 주섬주섬 과자 몇 봉지를 주워든다. 그렇게 몰입하여 선택하는 동안, 그리고 고른 걸 들고 계산대를 통과할 때까지 녀석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드디어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가 되어 환호성을 지를 차례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V자를 흔들며 세상을 다 얻은 듯 뛰기엔 아직 이르다. 이미 가진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모형이어서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워낙 품질이 조잡해서 조립하는 중에 연결부위가 끊어져 망가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망의 울음보가 터지는 순간이다. 뿐만 아니라 제 능력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조립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그 방면에 제일 실력 좋은 제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세상에서 가장 사이좋은 부자간의 아름다운 정경이 전개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애비의 기분에 따라 퉁맞기도 한다.

“에그몽 사지 않겠다고 아빠하고 약속했잖아. 또 할머니 조를래? 있는 거라고, 부서졌다고 울어대질 않나. 그리고 네 장난감이니 스스로 맞춰야지. 맞춰달라고 또 떼쓸 거야?”

저토록 가슴이 벌렁거리도록 나무라지 않고 사근사근 이해시키면 좀 좋을까. 졸지에 나는 영락없이 허튼 돈 쓰며 분별없이 쉬 고장 나는 시시껄렁한 장난감이나 사줘서 아이를 울린 경망스런 노인네가 된다. 내게 대놓고 책망할 수 없는 그는 제 새끼만 쥐 잡듯 한다.

제 어릴 땐 내가 한쪽 눈만 치켜떠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발이 저리도록 꼼짝도 못하던 아들이 이젠 이런 식으로 날 힐책한다. 자신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저지르고야 지금의 자기가 되었다는 것을 설마 잊진 않았겠지. 이미 그에게 한심한 늙은이로 낙인찍힌 것도 쥐구멍이 어디냐 싶게 민망스럽지만 그보다는 야단맞는 손자의 겁먹은 모습이 안타깝고 속상해 아들이 원망스러워진다.

그의 힐난이 대수랴. 새 에그몽을 사면 며칠 동안은 손에서 놓지 않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그것부터 챙기는 손자아이가 더 소중하다. 그걸 갈구하며 저 애원하는 눈빛을 어찌 외면하랴. 가게에 가는 동안 꼭 잡은 따뜻하고 조그만 손의 아찔하게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발걸음도 가벼이 즐거워하는 몸짓을, 무엇보다 그것을 탐색하고 조립하는 동안의 진지하고 암팡진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을 어찌 포기하랴.

소리도 없이 봄비가 온다 했더니 그 바람에 앵두꽃비가 내렸다. 단번에 떨어져버린 허망한 낙화가 길바닥에 쌓였다. 그날도 우리 둘은 앵두꽃으로 촘촘히 수놓아진 융단 길을 가로질러 에그몽을 찾아가는 행복한 공범자가 되었다.

앵두나무가 알알이 빨간 구슬을 달고 부른다. 가지 하나를 붙잡아 내려주니 행여 터질세라 앙증맞은 손으로 조심조심 떼어내는 민석이는 지난 봄 유치원에 들어갔다. 햄버그스테이크를 구워준다니까 트랜스지방이 많은 음식이라 몸에 좋지 않으니 안 먹겠다고 또박또박 이유를 밝히며 거절하여 제 외할머니를 당황케 한 당돌한 녀석이다. 유치원이 스트레스 천백프로란다. 벌써부터 세상살이에 갈등하는 어린 것이 안쓰럽기도 하다.

앵두 하나를 입에 넣어본다. 탐스런 모양새보다 막상 그 맛은 별로다. 머지않아 녀석도 오매불망하던 에그몽이 별 것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고, 그땐 녀석의 스트레스의 원인도 더 폭이 넓어지겠지만 나름대로 부대끼며 잘 버텨나가리라.

아이에게 얼개 탄탄하고 웅숭깊은 바람막이가 되고 싶다. 참아야할까. 그것이 난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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