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신성순
까맣게 그을렸다. 여름 햇살이 그렇게 만들었나보다. 고무줄로 된 반바지는 허리춤에서 한참 내려와 볼록한 엉덩이에 간신히 걸쳐져있고 그 끝자락에서는 바지를 잡아끌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물기가 묵직하게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마냥 즐거운가보다. 눈가에도 입술에도 하다못해 손놀림까지 웃음이 가득하다.
모처럼 강아지들과 함께 푸른빛이 사방을 에워쌀 무렵인 초저녁에 집을 나섰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집을 들고, 두 마리가 묶여있어 제법 묵직하게 느껴지는 끈을 한 손에 잡고 9월인데도 더운 공기가 후끈 목덜미를 부여잡고 있어 끈끈한 초저녁 길을 걸었다.
아파트촌이라지만 동네와 동네사이에 사뿐 내려앉은 천(川)과 산책로가 있다. 소위 뒷길이라는 곳으로 가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물가로 연결된 내려가는 계단이 올라온 만큼보다 두 배의 길이로 놓여있다.
그냥 걸어도 별반 시원한 걸 느끼지 못할 날씨에 지그재그로 뛰고 걷는 바람에 줄이 배배 꼬여 목이 조여들어 켁켁 거리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도무지 얌전하게 걸을 기색이 없는 강아지들 때문에 더 덥고, 또한 내 정신을 쏙 빼 놓는 산책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귀여운 말썽장이들을 보고 "아유, 예뻐라", " 어머, 너무너무 귀엽다. 남자예요, 여자예요?"라며 관심을 가져주면 나는 어느새 등줄기에서부터 시원함을 느끼면서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처럼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 자락을 주렁주렁 달고 대답하기에 바쁘다. "남매구요. 오빠 이름은 연이, 막내는 쫑이, 어미는 집에 있어요" 어쩌구 저쩌구......
그렇게 길을 걸었다.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 불규칙으로 삐죽삐죽 자란 저기 밭고랑에서 태어났으면 낫으로 단번엔 베임을 당할 만한 이름 모를 풀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큼한 냄새, 그래도 물가라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물기를 실어와서인지 뺨에 스치는 부드럽고 시원한 터치, 운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꼭 다문 입술이어서 사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고 다만 자연이 들려주는 사각사각 속삭이는 듯한 귀 간지러운 소리들...... 기분 좋은 느낌들이어서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던 그 후끈함들이 맥을 못 추고 달아나 버렸다.
띠엄띠엄 물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가 있다. 그곳에서 잠시 쉬자했다. 태어난 지 이제 6개월밖에 안되어서 생각보다 빨리 지치는 것 같다. 혀를 반쯤 내어놓고 헉헉거린다. 그 모습조차 나는 너무나 귀여워서 꼬옥 안아주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안쓰러워 좀 쉬어가자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연이와 쫑이는 내 옆에서 배를 쭉 펴고 엎드린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바람도 그 꼬리의 흔들림 속도만큼 느릿하게 살랑살랑 불어온다. 징검다리 위에는 초등학생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까맣게 그을린 윗몸을 내놓고 물기를 먹어 묵직해진 반바지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물 속을 들락거리면서 놀고 있다. 이는 내 어릴 적 냇가에서 놀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다리를 간지럽히는 물줄기며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그저 밝고 맑기만 한 꼬마들의 표정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나브로 해 걸음이 푸른빛을 뿜어낸다. 서서히 햇살의 열기를 거두고 달빛 기웃거릴 어둠의 등장을 알리려는 서막처럼 그렇게 파스텔 톤 푸르름으로 커튼을 드리운다.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찰라 적인 행복에 젖어든다.
아직 어둠이 빛을 가리지 않아 나는 잠시 쉬는 틈을 타 살며시 책을 펼친다. 내가 좋아하는 물 흐르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슬금슬금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다.
한참을 그렇게 머물고 있는데 물에 흠뻑 젖어 있으면서도 건강하게 보이는 여자아이가 해맑은 표정을 하고 내 옆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강아지들에게 딴지를 건다. 내 눈은 문자들 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이 소녀, 내게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물론 강아지들에 대한 관심표현이다.
이런 저런 대답을 해주었는데
"매일 이 시간에 나오세요?"
"아니, 자주는 나오지 않아.. 너는?"
"저는 자주 와요. "
"왜, 얘들 또 보고 싶어서?"
"네"
내가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대답에 다소 실망을 했는지 짧게 대답한다. 단 몇 분 동안 낯선 소녀에게 두 마리의 움직이는 장난감이 갖은 애교를 다 부려주었다. 겅중겅중 뛰기도 하고 폴짝거리며 안기기도 했으며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살갑게 놀아준 것이 그 아이를 기쁘게 했나보다.
"그래, 가능하면 이 시간에 산책하러 올게."
아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흥건하게 배어있는 소녀를 보면서 꼭 지켜질지 모를 약속 같은 말을 하고 말았다. 아이는 순박하게 배시시 웃으며 큰 소리로 "다음에 또 만나요"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연이는 무엇을 알기라도 하는 듯 폴짝 뛰어서 돌 위에 걸터앉은 내 무릎 위에 올라와 가슴에 폭 안기며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어둑어둑 까만 기운이 세상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저쪽 아파트 창에서 하나 둘 어둠에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강한 빛줄기로 듬성듬성 까망 속으로 기어든다.
아까와 다른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바람을 맞이하면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다시 두 마리의 강아지들과 즐거운 실갱이를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여전히 사람들은 입술을 꼭 닫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간다. 그들을 마주보며 나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한다. 강아지들은 여전히 신났다. 나를 힐끔 돌아보며 엉덩이 뒤뚱거리면서 총총총 나와 같은 속도로 걷거나 뛴다.
가을 속에 아직도 여름이 묻어있다. 후덥지근한 무엇이 그렇고 8월 내내 수마의 휘둘림에 아픔을 겪는 많은 이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가슴 슴뻑하게 할퀴는 무엇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렇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어떤 막연한 죄책감에 비를 좋아한다는 말도, 나 지금 어떤 일로 힘들어 라는 말도 감히 내어놓지 못하는 작금인데 오늘 9월 2일 어슬렁 넘어가는 해 걸음을 따라 슬쩍 다녀온 산책.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다 잊었다. 내 주변을 맴도는 갖가지의 현상들을 여과 없이
느끼고 바라보면서. 다시 돌아오면 현실일 텐데도./誠舜
<<책과 인생>> 1월호(2003,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