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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 아니 인연    
글쓴이 : 공인영    12-05-23 01:14    조회 : 3,790

 
 우연 아니 인연                                      

                                                                                                    

  고궁을 돌며 비를 맞던 신발이 기어이 탈이 났다. 햇수가 좀 지나긴 했어도 자주 신지 않아 새것 같더니 가죽이 아닌 세무라서 그랬을까, 어스름 저녁나절에 그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날씨에 취한 구두가 마냥 빗물을 빨아들여 스타킹도 발도 다 젖게 만든 뒤였다. 처음엔 종일 내리는 비에야 별 수 없지 했는데 자꾸만 소리도 좀 나고 발이 제법 시리다.
  아무래도 이상해 외진 길 가로등 아래로 가 살펴보니 이런, 얼핏 봐서는 모르겠던 구두의 밑창과 윗부분이 터져 슬그머니 입을 벌리는 게 아닌가. 빗물에 늘어난 구두 품이 오히려 발의 피로를 덜어준다 했더니, 이렇게 무디고 둔해터진 감각을 보았나.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운 중에도 지나가는 사람들 눈치부터 살핀다. 설마 이 꼴을 본 건 아니겠지? 아, 이런 망신이 어디 있담.
  연이은 모임 약속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도대체 인사동엔 구둣방이나 수선 집 하나도 눈에 띄질 않는다. 멋진 상품들이 차고 넘치면 뭘 해. 당장 필요한 건 오직 한 켤레의 구두뿐인데. 동동거리던 중에 마침 함께 있던 친구가 근처에 신발 취급하는 곳을 한 군데 기억해 낸다. 우린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갔다.
  ' 어머, 어쩌나, 매장에 그렇게 작은 치수는 진열하지 않는데요.'
 주문해야 된다든가 어쩐다든가. 이놈의 발 치수가 또 문제구나. 요즘이야 치수가 다양해서 별 문제 없지만 예전엔 그렇질 못했다. 다리품을 팔며 돌아다니고도 결국 아동화 코너에나 가보라는 놀림을 좀 많이 받았던가. 어디 그뿐이랴. 울며 겨자 먹기로 신발을 맞추고도 또 편안해질 때까지 까지고 아물기를 되풀이해야 했던, 생각만으로도 다시 발뒤꿈치가 쓰리고 아린 듯하다.
  ‘안 돼요 안 돼. 무조건 신어야 해요.’
  구두가 아니면 운동화도 좋고 아니, 슬리퍼라도 좋다고 마냥 징징거리는 모습이 영 딱했는지 창고를 한번 뒤져보겠단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이루는 게 기적이다. 그 기적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는 동안 진열된 신발들을 이것저것 신어 본다. 혹시 실수로 잘못 나온 건 없을까 싶어서.
  '어 이게 왜 여기 있지? 작아서 남았나. 이거 디자인이 좋아서 한참 전에 다 나갔거든요.'
  먼지 묻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오던 점원의 목소리, 옳거니! 그게 바로 기적이다. 구세주가 따로 없다.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그 구두가 게다가 세일까지 된단다. 이건 옵션이 붙은 기적이다. 
  신고 보니 제법 세련되고 예쁘다. 아니 사실은 골라본 적 없는 세련이다. 독특한 모양이 약간 부담이 되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친구는 딱 자기 스타일이라며 하나 더 있냐고 묻는데, 그러나 그것은 간절하게 소망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단 한 켤레의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이차저차 요차조차 우여곡절 끝에, 종일 내린 비 덕분에, 정말 한 폼 잡아도 좋을 멋진 구두를 신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임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밥 한 술 뜨다 말고 결국 멋지게 해결된, 이 놀라운 일에 대해 근질거리는 입을 참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구두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우연인가 인연인가.

 피곤한 몸을 기댄 채 돌아오던 늦은 밤 차 안에서 아차, 그제야 몇 년의 무게로 낡아가며 함께 걸었던 헌 구두가 생각났다. 새 것 마냥 세련되진 않아도 단정하게 한 줄 유리구슬이 박혀 맘에 들었던 신발이다. 몇 해 전, 친척 결혼식에 처음 신고 나설 때의 그 설렘과 산뜻한 첫걸음을 아직도 기억할 만큼.
  까만 세무가, 구슬의 반짝거림을 더 돋보이게 하던 구두. 맞춤에도 불구하고 결코 발뒤꿈치를 까지 않은 유일한 구두. 특별한 모임마다 골라 신던 가장 편안하고 익숙했던 그것과,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었다는 생각에 가슴마저 찡하다. 아무리 경황없기로 내팽개치듯 돌아선 주인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그러면서도 눈길은 어느 새 또 새 구두에 가 있다. 반질거리며 뾰족하게 돋은 콧등은 은근한 내 자존심 같아 기분 좋다. 조물조물 가장자리엔 주름을 잡고 레이스처럼 뒤꿈치를 덧댄 가죽은 그 부드럽기가 이미 가죽이 아니다.
  발등까지 가느다란 끈이 올라와 예쁘게 리본으로 마무리한 톡톡 튀는 디자인. ‘오즈의 마법사’ 의 도로시가 신었을 것 같은 깜찍하고 당당한 이 구두를 과연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은은한 광택에 또 가죽 냄새마저 좋아지는 새 파트너를 얼마나 자주 사랑하게 될까.
  허리를 굽혀 구두의 잔등에 올라앉은 물기를 쓱 닦는데 한 순간 날카로운 게 가슴을 쿡 찌르고 간다. 아! 인연은,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기도 하는구나. 느닷없이 움켜쥐기도 하고 미련 없이 탁 놓아버리기도 하는구나.

                                                                  < 2007. 불교문예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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