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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오는 소리    
글쓴이 : 김미원    12-05-23 19:27    조회 : 4,299
가을이 오는 소리
김미원
 
 작렬하던 태양과 함께 자지러지던 매미의 합창도 잦아들었습니다. 아직 늦더위가 남아있어 매미소리가 간간이 들려오지만 힘을 잃었습니다. 여름에서 살아남았다고 느끼는 순간 귀뚜라미 소리가 들립니다.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늙어감인가요. 무더위에 맥을 못추니 여름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아스팔트와 차량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린 영락없는 개 형상이었습니다. 그리도 좋아하던 여름이 싫어졌으니, 어느새 내 나이도 가을이 되었나봅니다.
 길 건너 빌딩 유리창이 석양을 반사해 황금빛으로 빛납니다. 지는 해를 보려고 서둘러 운동화를 신고 한강변으로 달려 나갑니다. 간간이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다이어트에 좋다는 마사이워킹 자세로 걷는 사람도 있고 뒤로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될까 하는 남자 아이가 ‘Let it be, let it be.’라는 비틀즈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려갑니다.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이 사랑스럽습니다. 그 아이는 벌써 인생을 아는가 봅니다. 그대로 두라니요.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감당치 못하고, 시간이 저 강물처럼 흘러가고, 사람도 잊혀지고, 우리 모두 세상에서 사라지고, 또 다른 세대가 태어나고 하는 진리를 그 아이는 정말 아는 걸까요.
 한없이 투명한 가을 하늘, 더욱 가까워진 앞산, 깊게 흐르는 강물, 한강변의 무궁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참 아름답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여름방학 끝 무렵 시골 외가에서 보던 탱자나무 울타리, 해바라기, 코스모스가 떠오릅니다. 동생들 육아에 힘드셨던 엄마는 여름 방학이면 나를 시골 외가에 보내셨더랬지요. 그때 방학의 끝자락을 알리는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보며 엄마 냄새를 기억했습니다. 다 잊혀진 줄 알았던 외갓집 기억이 오늘따라 왜 이리 선명하게 떠오르는지요.
 가을 탓이겠지요. 이제 곧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짙은 단풍이 곧 산하를 물들이고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곧 이어 그 잎들과 벼는 지상에서 옷을 벗고 다음 계절을 맞이하겠지요.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문득 한시책을 읽다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습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 역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곤 나처럼 쓸쓸함에 잠깁니다.
 
物旣老而悲傷. 夷, 戮也; 物過盛而當殺. 만물이 이미 노쇠하매 슬퍼 상심함이며, 사물은 성대한 시절을 지나면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奈何以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어이하여 금석의 자질도 아니면서 초목과 더불어 번영함을 다투려 하는가?
구양수 추성부(秋聲賦)
 
 구양수는 가을의 형상을 ‘맑고 밝아 하늘은 드높은데 해가 반짝이는 듯 하고 그 기운은 오싹하여 사람의 살과 뼈를 저미는 것 같고, 그 뜻은 쓸쓸하여 산과 내가 적막한 듯 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쇠나 돌도 아닌 살덩이로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느냐고 일갈했습니다. 나는 그의 일갈에 할 말을 잊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쇠와 돌에 비유하다니요. 그러나 또 한 편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인간은 사라져도 저 쇠와 돌은 남아있을 터이니 말이지요.
 그래요. 나 같은 인간이 금석의 자질도 아니고 초목도 아니거늘 번영함을 다투려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야할 때 멋지게 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도 허망한 욕심인 줄 압니다. 어느 노 정치인이 ‘서산에 해를 빨갛게 물들이며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경륜보다는 노욕이 느껴졌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도 구름이 끼었을 때가 더 아름답지 않던가요?
 내 인생이 아직 여름이었을 때 인생의 가을이 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고,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을에 서 있는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내려감, 느림, 비움이란 단어와 친근해지면 쪼끔은 자신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초가을,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많이 사랑하고 많이 감사하고 싶습니다.
 젊음이 아무리 좋아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좋습니다. 정점을 지나 하산하는 이 가벼움이 나는 좋습니다.
 이제 알찬 가을을 지내고 나면 겨울나그네처럼 앙상하지만 당당한 겨울나무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요.
 
수필문학 2011년 대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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